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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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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판 대결

등록 2012-11-21 22:35 수정 2020-05-03 04:27

“국정 운영의 기조를 국가에서 국민으로 바꿔야 합니다. …저는 ‘경제민주화 실현’ ‘일자리 창출’ ‘한국형 복지의 확립’을 국민행복을 위한 3대 핵심 과제로 삼겠습니다. 국민 행복의 길을 열어갈 첫 번째 과제로, 저는 경제민주화를 통해….”
경제민주화로 국민 행복을 이루겠다는 이 다짐은 누구의 것일까?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다. 7월10일 새누리당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다. 적잖은 이들이 이 메시지에 주목했다. 무엇보다 박 후보 곁에는 ‘경제민주화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 있었다. 진보·개혁 진영은 ‘재벌당이 무슨 경제민주화냐’면서도 김종인의 무게감 탓에 긴가민가했다. 재계는 김종인의 존재를 근거로 ‘박 후보가 대선 승리를 위해 재벌에 칼질을 하려는 거 아니냐’고 우려를 숨기지 못했다. 박 후보의 대선 정책공약 책임자인 김 위원장은 ‘경제민주화 공약’을 쏟아냈다. ‘재벌당’으로 불리는 새누리당의 박 후보가 그동안 야권의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에 맞서 경제민주화라는 불리한 링에서 경쟁하며 MB 정부와의 차별화를 통해 정권교체론의 예봉을 피할 수 있었던 데는 김종인의 존재가 컸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했다. 재계는 11월8일 박 후보와 경제5단체장의 간담회 뒤 “그동안 불안했던 점이 해소됐다”고 반색했다. 박 후보는 11월11일 황우여 당대표 등 핵심 측근 9명을 대동하고 ‘10 대 1’로 김종인 위원장을 만나 기존 순환출자 의결권 제한, 대기업집단법 제정, 중요 경제범죄 국민참여재판 의무화 등을 수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김종인을 버리고 재벌과 손잡기로 했다는 통보다. 실제 박 후보는 11월16일 경제민주화 공약 발표에서 이런 내용을 모두 뺐고, 김종인은 발표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써 대선 구도는 경제민주화의 방법론과 속도를 둘러싼 여야의 경쟁에서, 박 후보의 ‘재벌 중심 성장론’ 대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경제민주화론’의 정면 대결 양상으로 재정립됐다.
여야 대선 후보 모두 경제위기를 말한다. 문제는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다. 현실은 어떠한가. 영세자영업자와 중소상공인의 곡소리가 천지를 뒤덮은 지 오래다. 서울에서 특정 재벌 계열 편의점은 240m, 프랜차이즈 빵집은 422m, 대형 커피전문점 프랜차이즈는 556m마다 1개씩 자리를 잡고 있다. 동네 구멍가게·빵집·커피숍이 발붙일 틈이 없다. 일자리의 질도 형편없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837만 명으로 전체 임금노동자의 48%다. 저임금계층(임금노동자 중위임금의 3분의 2 미만을 받는 노동자)은 442만 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25.4%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다. 기업의 일자리 창출 능력도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2010년 한국의 2천대 기업(금융업 제외) 매출이 1711조원으로 2000년의 815조원에 비해 갑절 이상 늘었는데, 같은 기간 일자리 수는 156만 개에서 161만 개로 3.2% 느는 데 그쳤다. 대기업집단 내부에서조차 양극화가 심각하다. 시가총액 기준 상위 30대 기업의 총순이익 가운데 삼성전자·현대차·기아차 3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54.5%다. 2011년의 44.2%보다 10%포인트 넘게 높아졌다.
이 모든 수치는 재벌 중심 성장론의 비현실성·비민주성·비윤리성을 웅변한다. 요컨대 시대의 흐름은 경제민주화를 절실하게 원한다. 그러나 재벌은 힘이 세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권력은 이미 시장(재벌)에 넘어갔다”는 한탄도 있었거니와 지금 한국 사회의 최강자는 재벌이다. ‘힘센’ 재벌과 ‘대세’ 경제민주화의 한판 대결, 당신은 어느 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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