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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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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먹는 하마는 신작로를 타고 오네

더 닦지 않아도 될 상황인데 계획중인 도로만 5년간 49조원 상상초월 규모… 대선주자들의 ‘탈도로 선언’ 절실하다
등록 2012-10-30 18:21 수정 2020-05-03 04:27

어릴 때 읽었던 소설 같은 것을 떠올려보면 ‘신작로’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새로 뚫린 길을 통해 사람들이 바깥과 교류하고,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한다. 그때 ‘신작로’는 뭔가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듯한 느낌을 주는 단어였다.

전 국토에 바둑판 모양의 고속도로
그러나 지금은 그 신작로들이 너무 많이 생겨 몸살을 앓고 있다. 서울~문산 간 민자고속도로가 들어온다는 경기도 고양·파주 지역에서는 도로가 생기면 환경이 파괴되고 마을 주민들도 피해를 볼 뿐만 아니라 세금만 낭비된다며 주민들이 반대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경기도 군포에 있는 수리산을 관통하는 수원~광명 간 민자고속도로도 논란이 돼왔다. 환경 파괴, 산사태 우려 등이 제기돼왔다.
수도권만 문제는 아니다. 지방을 가거나 명절 때 시골에 내려가다 보면 새로 생긴 도로가 너무 많다는 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예전에는 경부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서해안고속도로·중부고속도로 정도만 알면 됐는데, 이제는 전 국토에 바둑판 모양으로 고속도로가 들어서고 있다.
기존의 구불구불한 국도가 직선으로 뻥 뚫린 고속도로급의 국도로 바뀌기도 한다. 물론 ‘시원하게 도로가 뚫려서 좋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도로를 건설하는 돈은 어디서 나올까? 결국 알고 보면,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만들어지는 도로들이다.
토건국가, 토건경제. 이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들이다. 대한민국 경제에서 토목건설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높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건설투자율은 한때 20%를 넘을 정도로 높았다가 지금은 많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는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토건경제를 떠받치는 핵심은 정부다. 4대강 사업으로 건설사들에 대형 일감을 만들어준 것은 하나의 예일 뿐이다. 그 외에도 정부는 끊임없이 토건사업을 벌인다. 영주댐·영양댐·지리산댐 등 대형 댐 건설을 여전히 밀어붙이고 있다.

왼쪽 곡선 도로가 현재는 군도가 된 옛 국도 3호선, 터널로 들어가는 직선도로가 새로 난 국도 3호선, 오른쪽 곡선도로가 중부내륙고속도로. 대표적인 중복도로다. 녹색연합 제공

왼쪽 곡선 도로가 현재는 군도가 된 옛 국도 3호선, 터널로 들어가는 직선도로가 새로 난 국도 3호선, 오른쪽 곡선도로가 중부내륙고속도로. 대표적인 중복도로다. 녹색연합 제공

비행기가 거의 뜨고 내리지 않는 썰렁한 공항도 많이 지었다. 예를 들면 개항 5년째를 맞은 무안국제공항의 하루 이용객은 300여 명에 불과하고, 2011년에만 79억원의 운영 적자를 냈다. 무안국제공항뿐만 아니라 지방 공항 14곳 중에서 11곳이 3년 연속 적자 상태다.

이런 토건사업으로 가장 이익을 보는 것은 대형 건설사들이다. 물론 이들이 직접 공사를 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공사를 따낸 다음 하도급을 줘서 이윤을 남긴다. 땅 짚고 헤엄치는 장사를 하는 셈이다. 결국 대형 토건사업을 벌이는 건 시민이 낸 세금으로 대형 건설사들의 매출과 이익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민자도로에 들어간 예산 1조8천억원

그렇지만 토건 예산은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이해 관계자들이 존재하고 잘못된 법·제도가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토건사업 중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도로다. 이제 더는 도로를 닦지 않아도 될 상황인데, 매년 도로를 추가로 건설하고 있다. 직접 정부 예산으로 도로를 건설하기도 하고, 민자도로라는 이름으로 건설하기도 한다. 그러나 말이 민자도로이지 정부가 최소운영수입을 보장하는 경우가 많다. 매출이 일정 수준에 못 미치면 세금으로 수익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민자도로에 들어간 정부 예산이 지난해까지 1조8천억원에 달한다. 사업자 처지에서는 손해 볼 일이 없는 것이다. 이런 부분이 계속 문제가 되자, 정부는 뒤늦게 최소운영수입보장제도를 없앴다. 그러나 이미 사업자와 협약이 체결된 사업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도 시민의 세금으로 민자도로에서 발생한 적자를 메꿔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정부는 계속 도로를 건설하려고 한다.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국토해양부가 세운 ‘제3차 중기 교통시설 투자계획’(2011~2015)에 따르면, 중앙정부는 5년 동안 총 49조원(그중 국비는 34조3천억원)이 넘는 돈을 도로에 투자할 계획이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2013년 예산안에도 8조4천억원이 도로 건설 예산으로 반영돼 있다.

총액으로만 설명하면 느낌이 잘 안 올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지금 건설 중인 동홍천~양양 간 고속도로에는 71.7km 구간에 2조7100억원이 들어간다. 1km에 377억원이 들어가는 셈이다. 그런데 기존의 영동고속도로도 있고 44번 국도도 있다. 과연 동홍천~양양 고속도로에 이렇게 많은 돈을 쏟아붓는 것이 옳은 일일까?

이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3번 국도를 넓게 잘 닦아놓고 바로 그 옆에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지나가게 한 경북 문경 부근도 중복도로의 대표적인 예다. 중복도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도로를 계속 닦아서 자동차 중심의 교통체계로 가는 게 바람직한지의 문제도 있다. 석유 가격은 올라가고 기후변화를 가져오는 이산화탄소 배출도 부담이 된다. 자동차 이용을 줄여야 하는 판에 도로를 계속 닦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법·제도의 문제도 크다. 도로를 닦는 예산 중 상당 부분은 휘발유·경유에 붙는 교통·에너지·환경세에서 나온다. 1년에 12조~13조원이 걷히는 교통·에너지·환경세의 80%를 ‘교통시설 특별회계’라는 곳에 몰아넣어 놓고, 그중 절반 이상을 도로 건설에 쓰고 있다. 매년 꼬박꼬박 돈이 들어오니, 담당 부처인 국토해양부는 돈을 쓰기 좋다. 그러니 중복되고 불필요한 도로를 계속 닦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런 돈을 도로에 쓰지 않고 다른 데 쓴다면 우리 삶이 달라지지 않을까? 정부 자료에 따르더라도, 국토 면적 대비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길이는 OECD 30개국 중 5위, 국도는 7위에 달한다.

면적 대비 고속도로 길이 OECD 5위

최근 대선 후보들이 이런저런 공약을 내놓고 있지만 ‘도로 그만 닦겠다’는 공약은 아직 없는 것 같다. 생각이 있는 후보라면 ‘탈도로’ 선언이라도 하는 게 옳다. 국가재정도 날로 어려워지고 있고 지속 가능한 환경·에너지, 농업 살리기, 교육, 복지 등을 위해 돈을 써야 할 곳도 많은데, 더 이상 도로에 쏟아부을 세금은 없다.

녹색당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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