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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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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도 택시 운전사였다

도시 서민의 마지막 선택, 택시 운전사들의 고단한 뒷모습
일터 근처의 기사식당에서 나온 아저씨들을 보며 아버지를 떠올리다
등록 2012-05-30 21:04 수정 2020-05-03 04:26

“회사 때려치울까?”
“뭐해먹고 살려고?”
“할 거 없으면 택시 운전이나 하지, 뭐.”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했던가? 누가 그런 듣기에 귀 간지러운 소리를 했을까? 오래 살아본 건 아니지만, 직업에는 단순한 호불호를 떠나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타인의 시선과 편견으로 정해지는 귀천이 분명 존재하더라.

주머니가 축 처진 남방, 엉덩이가 닳은 바지
택시 운전은 실업률이 높은데도 젊은 청년들에게는 구미가 당기지 않는 기피 업종 중 하나다. 그렇지만 택시는 마땅히 갈 데 없는 사람들이 하다하다 할 것 없을 때 마지막으로 선택하게 되는 직업이기도 하다. 택시 운전사들 스스로도 자신을 ‘도심 속 막장 인생’이라 부르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내 아버지도 택시 운전사였다. 물론 처음부터 택시 운전을 했던 건 아니다. 아버지도 여러 업종과 직업을 두루 섭렵하시다, 제일 마지막으로 택하게 된 것이 택시 운전이었다. 사납금 맞추기가 힘들어지고 건강이 나빠져 그만두기까지 5년가량 택시 운전을 하셨다.
1천원짜리 지폐 뭉치로 가슴팍 주머니가 늘 축 처져 있던 물 빠진 푸른 남방, 엉덩이 부분이 닳을 대로 닳아 번들거리던 검정 양복 바지, 남방 소매 부분을 기점으로 흑백으로 경계가 지어질 만큼 시커멓던 아버지의 손은 지금도 생생하다. 순전히 내 기분 탓이었겠지만, 택시 운전을 하던 아버지는 늘 피곤하고, 뭔가 모르게 찌들어 보이고 심지어 궁상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사납금을 맞춰 회사에 낸 뒤, 한 푼이라도 남겨 집에 가져다줘야 우리 네 식구가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납금을 맞추고 남는 돈이라 해봐야 2만~3만원이 고작이고, 그나마도 야간근무를 할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 돈에서도 택시 가스 충전을 하고 나면 실제 집에 가져올 수 있는 돈은 별로 없었다. 주간근무 때는 사납금을 맞추지 못하는 날도 더러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밥을 사 먹는 돈도 아까웠던 아버지는 집 근처 주변까지 손님을 태우게 되는 운 좋은 날이면 꼭 집에 들러 끼니를 해결했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손가락에 마른 침을 뱉어가며 그 냄새 나는 돈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셌다. 어떤 날은 ‘사납금도 못 맞추겠다’고 투덜거리며 밥도 씹는 둥 마는 둥 삼키고는 곧장 일어나 나갔고, 또 어떤 날은 ‘사납금은 맞춰놨다’며 1천원짜리를 몇 장 빼서는 선심 쓰듯 내 앞에 내밀고는 했다. 그런 날은 식사를 마치고 30분가량 토끼잠을 주무시고 나가는 여유도 부려볼 수 있었다.

아버지가 받을 오해가 싫었다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아버지가 택시 운전을 하는 것이 싫었다. 굳이 낡아빠진 옷차림이나 찌든 담배 냄새와 쾌쾌한 돈 냄새가 밴 검은 손이 아니었더라도, 택시 운전사에 대한 나의 막연한 선입견이 문제였을 것이다. 택시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이용하는 대중교통 중 하나이지만 택시를 이용한 범죄, 난폭운전에 승차 거부, 교통법규 무시 등 택시 하면 떠오르는 나쁜 선입견이 너무 많다. 실제로 나도 밤늦게 택시를 타게 되면 차 번호판을 확인하거나, 택시 자격증에 등록된 사진과 택시 운전사 얼굴을 대조해보게 된다. 그리고 되도록 택시 운전사와 승객이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채 목적지까지 가기 바라게 된다. 그래서 늘 택시를 타면 뒷좌석에 깊이 몸을 파묻고는 눈을 감고 자는 척하는 경우가 많았다. 괜히 택시 운전사들과 말을 섞게 되면 우리나라 정치며, 경제, 심지어 연예계 가십까지 장황하게 설교를 듣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반대로 낯선 곳에서 택시를 타게 되면 길을 돌아가지는 않는지, 일부러 서행하며 요금 올리기를 하는 건 아닌지 감시하듯 꼿꼿하게 앉아 창밖만 응시하기도 한다.
나는 내 아버지도 남들의 이런 애꿎은 오해와 편견의 시선을 받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통해 택시 운전이 육체적으로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게다가 사회의 차가운 시선까지 감내해야 하는 이중의 고통이 어떤지 잘 알면서도 말이다.
택시 운전사들은 나름의 고충이 많다. 보통 2교대 근무를 하는 택시 운전사들은 하루 10만원 안팎의 사납금을 회사에 납입해야 하는데 이것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하루 10시간가량 근무해야 겨우 사납금을 맞출 수 있고, 그렇게 해서 한 달에 받아가는 급여는 기껏해야 100만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최근에는 치솟는 액화석유가스(LPG) 가격으로 더욱 어려워진 상황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택시는 영국이나 미국의 택시업 진입장벽에 비하면 너무 낮아, 1종 운전면허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래서 은퇴한 뒤 집에 있느니 택시라도 몰자는 사람들까지 몰리다 보니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택시 운전사들은 공적자금을 투입해서라도 택시 수를 줄여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정부는 예산상의 이유로 힘들다는 태도다.
택시 운전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이라서 감정노동까지 감내해야 한다. 콜택시를 불러놓고도 콜택시가 오는 사이 지나가는 빈 택시를 타는 사람들 탓에 허탕을 치는 경우도 빈번하고, 늦은 밤 술 취한 손님들의 주정과 폭언, 심지어 폭행당하거나 요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직률도 높은 편이다.

“한 바리 또 돌아보러 가볼까”
민주노총 부산본부 사무실이 있는 범일동에는 기사식당들과 LPG 충전소가 자리하고 있어서인지 택시 운전사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특히 점심시간에는 식당 주변 곳곳에 영업용 택시가 주차돼 있고, 각기 다른 색깔의 유니폼을 입은 택시 운전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을 심심치 않게 본다.
오고 가는 길에 그분들의 대화를 엿들어보면, 지난날 내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난다. 교대 시간이 다 돼가는데도 사납금을 못 채웠다는 얘기, LPG 가격 인상으로 손님을 찾아 거리를 다니는 게 겁난다는 얘기, 거친 욕설이 중간중간 섞인 그분들의 대화는 대체로 힘든 생활에 대한 불만으로 끝난다.
하지만 그들의 불만과 거친 말투가 마음에 걸리는 건, 그것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조건 속에서 또 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든 가장 기층에서 힘없고 소외된 이들의 삶을 통해 그 사회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피우던 담배를 땅바닥에 비벼 끄며 “한 바리(바퀴) 또 돌아보러 가볼까” 하고 일어서는 택시 운전사들의 뒷모습에서 도시의 고단함과 팍팍함이 느껴지는 걸 보면 아직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은 먼가 보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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