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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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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약속

‘집회 참가’ 핑계로 생계비 지급 약속 지키지 않는 한진중공업
노사가 한 ‘사회적 약속’이 깨지면 살아갈 희망도 깨진다
등록 2012-04-18 15:40 수정 2020-05-03 04:26

몇 해 전, 건설현장에서 일용직으로 근무하던 한 남자에게서 상담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에서부터 남자는 격앙돼 있었다. 상담 전화는 경기가 어렵다고 임금을 차일피일 미루다 끝내는 주지 않았다는, 민주노총 부산본부에서 일하다 보면 하루에도 십수 건은 있을 만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동안의 상담자와 좀 달랐다. “이제는 돈도 다 필요 없고, 그 새끼 칼로 찔러 죽이고 나도 죽으면 그만이라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막노동꾼 남자에게 돈보다도 더 상처를 입힌 것은 무엇이었을까. 건설현장에서 이른바 ‘노가다’로 밥벌이를 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던 남자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사장에 대한 적의가 가득했다.

수주할 시간에 사진 채증 다니나
월급 받아 그달 생활하는 노동자가 몇 달째 월급 한 푼 없이 산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사정이 좋아지면 꼭 지급하겠다며, 오늘 준다, 내일 준다는 그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남자는 혹시라도 월급이 늦어지거나 받지 못하게 될까봐 연신 목소리를 낮추고 허리를 숙여야 했다. 그런데 끝내 사장이라는 사람은 ‘줄 돈이 없어서 그러니 받고 싶으면 법대로 해라’며 오히려 당당했다. 사장에게는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그 아무것도 아닌 말 한마디를 ‘약속’이랍시고 믿고 기다린 자신의 믿음에 대한 배신이 그 남자를 더 괴롭혔다. 그래도 사장을 한때는 한솥밥 먹는 가족이라 여겼던 그는 얼마나 어리석었던 것일까.
우리는 사는 동안 많은 약속을 한다. 술을 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 영원을 맹세하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 친구와의 소소한 약속, 사회적 약속 등등. 그 약속들 중에는 지켜지지 않은 약속, 잊혀지는 약속, 그럼에도 여전히 기다리는 약속이 많이 있다.
누군가는 하기 쉬운 말로 깨라고 하는 것이 약속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지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하다못해 친구와의 저녁 약속이 깨져도 섭섭하고,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도 마음이 무거운 법이다. 하물며 개인 간의 약속이 아닌, 기업의 대표와 노동조합의 대표가 만나 서로 종이에 도장까지 찍고 한 약속에 대한 책임은 더 무겁다. 지난해 불법·부당한 정리해고로 많은 이들을 고통스럽게 한 한진중공업은 1년간의 긴 싸움을 끝내며 정리해고한 노동자를 1년 안에 복직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1년의 시간 동안 복직 대기자들에 대한 생계비 지급 또한 약속했다. 하지만 한진중공업은 최근 약속한 생계비를 지급하지 않았다. 작업복을 입고 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에서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이전에도 작업복을 입고 집회에 참석하는 일이 다반사였을 뿐만 아니라 같은 노동자로, 더구나 해고라는 같은 아픔을 공유한 이들과의 연대는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한 척의 배라도 더 수주하려고 동분서주해야 할 시간에 해고자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일일이 따라다니고 기록하고 채증까지 해서는 증거자료랍시고 내미는 회사가 과연 회사 정상화와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해줄 수나 있는지 모르겠다.
한진중공업은 해고자에 대한 생계비 지원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수주 물량 확보를 통한 회사 정상화에 노력해 남은 직원들의 고용도 보장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회사는 여전히 단 한 척의 배도 수주하지 못했고, 휴업자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휴업자들은 해고자들과 달리, 이중 취업을 할 수 없어 휴업급여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보니 생활고에 시달리는 노동자가 많다. 부인은 마트에서 야간조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아이들은 학원을 끊었다.
하지만 생활고보다도 그들을 더 힘들게 하는 건 공장을 떠난 시간이 기약도 없이 길어지는 것이고, 어쩌면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일지 모른다. 휴업을 나간 사람도, 공장 안에 남은 사람도, 모두에게 힘겨운 시간이 흘러간다.

2011년 6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농성을 벌이던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맞은편에서 정리해고당한 노조원들이 앉아 있다. 생사를 건 투쟁 끝에 얻은 생계비 지급 약속을 회사 쪽은 지키지 않고 있다. <한겨레> 류우종

2011년 6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농성을 벌이던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맞은편에서 정리해고당한 노조원들이 앉아 있다. 생사를 건 투쟁 끝에 얻은 생계비 지급 약속을 회사 쪽은 지키지 않고 있다. <한겨레> 류우종

꽃잎처럼 떨어진 서른여섯의 사내

아직 휴업을 나가지 않은 동생이 동네 목욕탕 앞 평상에서 몇 달째 휴업 중인 동료 형을 만났단다. 봄 햇살 속에 하염없이 넋을 놓고 앉았던 형은 동생을 알아보고는 “회사 잘 돌아가냐”며 인사를 건넸다. “회사… 곧 망할 낍니다.” 몇십 년을 배 만드는 일만 했던 그이가 없어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피는 저 봄꽃처럼, 회사는 아무렇지 않다는 말을 그 사람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십 몇 년간 자신의 청춘을 보낸 그 회사가 곧 망할 거라고 위로하는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작업복 차림이 아닌 추리닝에 슬리퍼 차림으로 마주 선 동네 목욕탕 앞에서의 만남이 차라리 다행이다 생각했을까, 아니면 곧 자신도 휴업을 나가야 할지 모를 불안한 미래를 그이를 통해 보았던 것일까. “날씨는 왜 이렇게 지랄같이 좋은 거야.” 포근한 햇살과 따뜻한 바람,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서럽던 어느 날의 오후 풍경이 눈으로 보는 듯했다.

얘기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애써 웃으며 아닌 척, 모른 척했지만 이들의 마음속에 원망이 생길까봐, 절망이 자랄까봐 나는 솔직히 겁이 난다. 쌍용자동차에서 또다시 한 사람이 목숨을 끊었다. 22번째 죽음이다. 사람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희망이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진다.

다른 이에게 생긴 반가운 일이 기다리면 나에게도 생길지 모른다는 기대,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나아질 거라는 희망, 그리고 그 속에서 조금씩 세워보는 계획은 사람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된다.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공장으로 돌아갔다면, 회사가 그들에게 한 약속이 조금이라도 지켜졌다면 그들이 그렇게 죽었을까.

꽃잎 끝에서부터 누렇게 변색되다가 결국엔 목이 똑 부러져 낙화하는 목련. 서른여섯의 그 사내도 그랬겠지. 쌍용차 77일간의 옥쇄파업에도 참가하고 끝까지 희망퇴직을 거부하면서까지 의지가 강했던 그를 끝내 죽음으로 내몬 건 무엇이었을까. 해고자의 힘겨움, 구직자의 서러움, 21번의 장례를 지켜봐야 했던 참담함. 봄바람이 한창이던 3월의 마지막 날, 그의 마음은 그렇게 시들 대로 시들다 결국엔 자신의 집 아파트에서 꽃잎처럼 뛰어내렸다.

지켜지지 않는 약속은 얼마나 처참한가. 그럼에도 실낱같은 기대로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남은 자들의 마음은 또 얼마나 곤욕인가. 다 포기하고 돌아서 가고 싶지만 이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나마 만들기 위해 치러야 했던 희생과 고통의 시간은 어찌 버릴 것인가. 그들의 약속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우린 어떤 약속도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터질 듯한 분노와 슬픔이 연대로 이어지지 못하는 우리는 얼마나 무력한가.

죽고, 맞고, 끌려가며 받아낸 약속

한진중공업, 쌍용차! 그들은 우리 내일 만나 저녁 먹고 영화나 보자는 약속을 한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이 죽고, 맞고, 끌려가고 그러고서야 겨우 받아낸 ‘약속’이다. 국민의 간절한 바람과 관심이 만들어낸 ‘사회적 약속’이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도 쉽게 저버리고 심지어 22명의 죽음 앞에서도 철저히 외면하는 그들은 얼마나 더 큰 죄악을 저지를 것인가. 그 모든 것들에 침묵하는 우리는 시대의 죄인이 될 것인가. 뭉게구름 같은 벚꽃나무 아래로 꽃비가 내린다. 살아생전 너무나 쓸쓸했던 서른여섯의 그이가 저 꽃비 속을 걸어 평안한 곳으로 갔기를 간절히 바란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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