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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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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창문 너머 동백꽃 핀 날에도 오지 않는 노동의 봄
일하다 숨진 아들의 아버지, 퇴사당한 여성을 보며 봄 같은 정치를 기다리다
등록 2012-04-05 10:32 수정 2020-05-03 04:26

봄은 변덕이 심하다.
바람이 한결 따뜻해져 봄인가 보다 했다가 옷자락 끝엔 아직 겨울이 남아 몸을 움츠리게 만들고, 새순이 돋는 걸 보고 이제는 봄인가 보다 했다가 솜털 보송한 새순 위로 찬비가 내려 애를 태우게 한다. 기다리는 사람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봄은 그렇게 멈칫멈칫 온다. 내가 일하는 민주노총 부산본부 사무실에는 큰 창이 하나 있다. 네모난 모양에 유리가 붙어 있으니 창이라 부르지, 사실 창 구실은 잘 하지 못한다. 창문 밑으로 바짝 붙어 선 나무들 때문에 햇살은커녕 바깥 풍경도 제대로 볼 수 없고, 1층이다 보니 방범용 쇠창살이 붙어 있어 감옥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한 날 생각 없이 쳐다본 그 창문 사이로 동백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3월29일 봄기운이 물씬 나는 서울시청 광장 옆 벽에 ‘비정규직 100인 위원회’가 내건 펼침막 앞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3월29일 봄기운이 물씬 나는 서울시청 광장 옆 벽에 ‘비정규직 100인 위원회’가 내건 펼침막 앞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뙤약볕에 일하다 쓰러진 젊은 아들

“옴마야” 나도 모르게 나온 소리에 내가 그만 머쓱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정말이지 1년, 열두 달, 365일 동안 단 한 번도 그것이 동백나무라는 걸 알지 못했다. ‘봐주는 사람도 없이 언제 그렇게 피었니, 그것도 어쩌자고 그리도 활짝 피었니’ 싶었다.

동백꽃에 취해 있던 그날 오후, 허름한 추리닝 차림으로 조심스레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소 문을 두드리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한눈에도 몸이 많이 불편해 보였다. 내준 의자에 힘들게 앉는데 보니 오른쪽 팔과 다리를 잘 쓰지 못했다. 쭈뼛거리며 들어선 모습과 달리 남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의 얘기를 쏟아냈다.

지난해 6월, 아들이 첫 직장을 얻어 출근을 했단다. 화물차에 화물을 적재하는 힘든 일이었지만, 군대를 제대하고 한참 만에 얻은 직장이라 아들은 활기차 보였다. 그런 아들은 처음 해보는 일이기도 하고, 첫 출근이다 보니 열심히 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6월 한낮의 뙤약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하는 일이다 보니 갑작스레 몸에 무리가 갔으리라. 아들은 오후 5시 무렵 작업 중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아들이 죽은 이유라도 알려고 의뢰한 부검 결과는 원인 불명으로 나왔고, 경찰은 조사 중인 사건이라며 가족에게도 수사 과정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몸이 불편한 아버지는 1년을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가는 곳곳마다 신통한 수는 없었다. 그리고 끝내 근로복지공단은 사망 원인 불명으로 산업재해 인정을 해주지 않고. 사장이라는 사람은 장례식장에 사람을 보내 200만원을 던져주고는 그길로 연락을 끊었다.

“내 집에 들어온 개가 죽어도 이리는 못하는데 말이지예, 내가 생때같은 아들 팔아 돈 벌자는 것도 아닌데….” 그동안 아버지는 이 똑같은 얘기를 수백 번은 더 하고 다녔겠지. 저렇게 문 두드리는 곳곳마다 그냥 맥없이 돌아서 가셨겠지. 아버지가 돌아간 뒤 창살 틈으로 흐드러지게 핀 동백꽃을 한참을 보았다. ‘그 청년은 너처럼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죽었어. 넌 어쩌자고 그리도 활짝 피었니.’ 그 아들은 29살이었다.

상담소에 있다 보면 다양한 사람과 사연을 접하게 된다. 공공기관에서 계약직으로 일한다는 남자는 이번 3월이면 딱 2년이 된다며, 이제 정권도 바뀔 테니 그럼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그것 때문에 당장 3월부로 재계약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듯했다. 아파트 경비일을 하는 일흔이 넘은 노인은 24시간을 일하며 실제로는 쉬지도 못하는 휴게시간을 10시간 만들어놓고는 50만원을 받는다며 혹시 자기 사연이 언론에 보도라도 되면 형편이 좋아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우리나라 언론이 노동자의 삶에 그다지 지면을 할애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사 운 좋게 지역신문 작은 귀퉁이에라도 실린다 쳐도 그길로 노인은 회사를 그만둬야 할지 모른다.

선거와 정치에 무심한 이유를 알지만

16년을 일한 서른네댓의 간호사를 해고하며 나이가 많아서 그렇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고는 자기네들 병원은 1998년 이후로 해고 자체가 없는 병원이라며 자진 퇴사라는 더 말도 안 되는 사직을 강요하는 병원도 있다. 며칠 뒤 다시 걸려온 전화에서 그 간호사는 부끄러워서 자기가 못 다닐 것 같다며 실업급여라도 챙겨줄 때 그만두기로 했단다. 그러면서 지난해 여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로 희망버스가 여러 차례 부산에 오는 걸 보면서도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며, 뒤늦게 그 노동자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우리는 이렇게 염치도 예의도 없는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왜 오히려 우리가 더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해야 하는 걸까.

요즘 거리 곳곳에 붙은 선거 포스터와 현수막, 길바닥을 뒹구는 후보들의 명함을 보며 봄과 함께 선거의 계절이 돌아왔음을 느낀다. 하지만 후보와 선거운동원들만 바쁘게 움직이지 대다수 시민은 여전히 선거에 무관심하고 정치가 나와는 무관한 딴 세상의 일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매일 언론이나 각종 인터넷 매체를 달구는 비방과 폭로전을 보고 있자면 그도 무리는 아닌 것 같다.

오랜 겨울을 지나 맞는 봄볕, 봄꽃, 봄바람 같은 정치는 없는 걸까. 봄바람처럼 살포시 마음을 설레게 하고, 봄꽃처럼 기다려지고, 봄볕처럼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줄 그런 정치 말이다.

일을 하다가 죽은 게 명백함에도 산업재해로 인정해주지 않아 몸이 불편한 아비를 1년을 길에서 헤매게 하는 비상식의 사회. 열심히 일한 만큼 대가를 요구하는 게 해고로 돌아오는 법 위에 군림하는 사회. 사회 안전망이 전혀 없는 사회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살인과도 같은 해고가 남발되는 잔인한 사회. 이런 사회를 바꿔낼 수 있는 정치가 어느 때보다도 간절해진다. 그래서 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이번 선거를 무관심이나 방관, 포기로 보내버리면 안 될 것 같다.

혼자만 행복해질 수 없는 사회

요즘 페트라 켈리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라는 말을 다시금 곱씹게 된다. 나 개인의 문제가 바로 내 주변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난해 여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작된 희망버스. 그 희망버스를 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었고, 그것이 개인의 문제를 벗어나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데 공감했다. 열심히만 살아서는, 혹은 나 혼자만 잘살아서는 더 이상 행복해질 수 없는 사회다. 그래서 이번 4·11 총선에서 소중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대수롭지 않고 부질없는 일이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출발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봄꽃들의 화사하고 격정적인 시간이 지나면 신록이 찾아올 것이다. 자연의 시간이 바람을 타고 그냥 왔다 가는 것 같지만, 그 속의 작은 생명은 비와 바람, 추위와 더위, 무수한 낮과 밤을 버텨 꽃과 열매를 맺는다. 우리도 그런 인내와 노력의 시간을 지나 신록을 맞을 수 있기를 .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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