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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퇴거금지법을 제정하라

등록 2011-09-28 12:03 수정 2020-05-03 04:26

인권운동사랑방 사무실이 있는 동네에서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다. 지나가던 아주머니 한 분이 흘낏 쳐다보며 슬쩍 “뭐예요?”라고 물었다. “구청에서 이 동네를 재개발하겠다고 해서 정보도 알려드리고, 반대하시면 서명도 하시라고” 말하는데 옆에서 같이 전단지를 돌리던 옆집 아저씨가 “주민이세요?”라고 불쑥 질문을 던졌다. “아니요.” 아주머니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에 사는 분이 분명한데 주민이 아니라고 답한다. 물어본 아저씨나 대답한 아주머니나, 개발에 관해서라면 세입자는 주민이 아니라고 마음이 통한 것이다. 잠시 멍해졌다.

강제퇴거금지법을 제정하라

강제퇴거금지법을 제정하라

세입자는 주민이 아니다?

옆집 아저씨는 이 동네 토박이다. 서울 중림동 삼성아파트가 들어선 자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작고한 김기찬 사진작가가 30년 동안 골목길 풍경을 찍었던 자리다. 사진에 담긴 골목, 그 한편에 자리잡은 고려이발관의 이발사를 기억하는 분이다. 구청이 이 동네를 개발구역으로 지정하려 한다는 소식은 이분에게 날벼락이었다. 이제 발 뻗고 자는가 싶더니 또 개발을 한다는 거다. 이 동네는 1980년대 초에 자력재개발 방식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춘, 이제 30년도 안 된 동네다. 동네 주민들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그 자리에 살던 사람들이 얼마나 멀리 떠나갔는지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같은 일을 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분들이 사무실을 찾아와 하소연하는 얘기는 “구청이 뭔데 우리 재산권을 무시하고 개발을 추진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재산 지켜줘서 고마워요”라는 인사도 덧붙인다. 흔히 사람들은 개발을 ‘재산권 행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개발은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권리가 경합하고 충돌하고 조정되는 사업이다. 그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것이 재산권의 이름으로 옹호돼왔을 뿐이다. ‘재산권이 무엇이냐’는 근본적 질문은 사라지고 재산권 물신만 남은 풍경이다.

이분들이 원하는 것은, 오늘 잠을 잔 집에서 내일도 자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이다. 이는 집을 소유했거나 그렇지 않거나 모두가 바랄 만한 보편적인 요구다. 이 의미를 담은 ‘주거권’이라는 말은 아직 이분들에게 생경하다. 그래서 소유주인 이분들은 재산권을 주장하며 개발에 반대한다. 그리고 재산권이라는 말을 가져다 쓸 수 없는 세입자들은 같은 바람, 같은 요구를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오히려 그 재산권 때문에 개발사업에서 세입자는 정보도 제공받지 못하고, 사업에 대해 의견을 내는 결정에 참여할 수 없고, 모든 것이 결정된 뒤 떠나라는 통지만 받게 된다. 즉, ‘주민’ 대접을 못 받는다.

구청도 다르지 않다. 얼마 전에는 구청이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한다며 직접 설문조사를 받으러 다녔다. 한 세입자가 반대한다고 했더니 조사 나온 사람이 “임대아파트 나오는데 왜 반대하느냐”고 물었단다. 구청에 전화해서 임대아파트가 대략 몇 평이고 보증금이 얼마나 필요한지도 얘기했느냐고, 편파적인 조사에 대해 항의했다. 그 세입자가 임대아파트에 들어가는 걸 책임질 수 있느냐고 따졌다. 공무원의 대답은 이거다. “구청이 왜 책임져야 합니까?” 개발사업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제2의 용산을 막는 법

그 끝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2009년 서울 용산 참사는 이렇게 시작된 개발의 끝을 너무나 참혹하게 보여주었다. 그래서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 제도개선 위원회’는 장례식 이후 용산참사재발방지법을 준비해왔다. ‘강제퇴거금지법안’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 법안이 용역 폭력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재정착 권리와 개발사업의 시행 원칙까지 밝히는 이유가 그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개발사업에 대해서도 정확히 맞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법안은 지금까지 한국의 법조문에서 볼 수 없던 ‘주거권’이라는 말을 담고 있다. 살던 집에서 계속 살 권리, 살고 있는 동네의 개발에 대해 의견을 낼 권리, 이런 권리의 자리를 여는 법안이다. 용산 참사 3주기를 맞기 전에 제정되길 바란다. 지금도 너무 늦었으니 말이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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