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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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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위한 더 넓은 사랑의 마당

전주에서 장애·비장애 통합교육 어린이집 운영하는 최영신 원장…힘들고 눈물겹지만 하루하루 달라지는 아이들이 가르쳐준 하늘색 꿈
등록 2011-05-27 12:21 수정 2020-05-03 04:26

툭하면 ‘어린이집 원장의 은밀한 비밀’이 파헤쳐지고, 인터넷 기사만으로도 부모들을 분노케 하는 사연이 줄을 잇는 인터넷 특종시대. 그러나 전북 전주시 효자동 주택가에 자리한 ‘빛샘 가정어린이집’은 그런 이야기와 관계없이 장애아동과 다문화가정 아동들까지 포괄하는 통합교육을 사랑으로 실천하고 있다. “저보다 더 좋은 원장님들이 진짜 많아요. 나쁜 사례만 알려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최영신(44) 원장은 무릎에 앉은 아이와 눈을 맞추며 말한다.

편견 없는 눈과 마음으로 열다

고향은 전북 무주였다. 밑으로 태어난 동생에게는 장애가 있었다. 목사이던 어머니는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소망과 감사가 넘쳤다. 1남3녀 중 장녀인 최영신씨는 그렇게 자연스레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짓지 않는 맑은 눈과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됐다.
어머니의 뒤를 따라 오빠는 사역의 길을 걸었다. 또 다른 동생은 사회복지사가 됐다. 최영신씨는 물리치료학과를 택했고, 대학생활 동안 장애우 섬김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직장도 장애아동들을 위한 치료실을 택했다. 7년간 일하는 동안, 그녀가 만난 아이들은 모두 몸이나 마음이 아팠지만 사랑스럽지 않은 아이는 없었다. 그래도 부모들의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육체적 발달에 관심을 쏟는 유아기를 거쳐 아동기에 이르는 동안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편견에 가로막혔고, 보호라는 미명 속에 격리되기 일쑤였다. ‘어울리기 어렵다’는 이유였으나, 아이들에겐 사회성을 키울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다.

지난 5월18일 최영신 원장이 자신이 운영하는 ‘빛샘가정어린이집’에서 통합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며 밝게 웃고 있다. 한겨레21 이종찬

지난 5월18일 최영신 원장이 자신이 운영하는 ‘빛샘가정어린이집’에서 통합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며 밝게 웃고 있다. 한겨레21 이종찬

안타까운 사연들에 함께 울고 고민하는 동안 최영신씨도 결혼을 했고 아이들을 낳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들의 말랑말랑한 손을 잡으며, 그녀는 부모들의 심정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어느 날, 그녀는 번화가를 걷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제 갈 길이 바빠 황급히 지나치거나 무리지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 모두 아이가 있겠지. 그 아이들만큼 어린이집도 늘어갈 테고. 그런데도 장애아이들을 위한 곳은 별로 없구나.’

번뜩 그녀에게 떠오른 것은 ‘내가 만들어보면 어떨까. 육체적 치료와 함께 마음까지도 치유할 수 있는…’ 하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장애아 통합 프로그램에 관한 교육을 받는 등 천천히 그 시작을 준비하게 된다.

2004년, 수익성은 염두에도 없이 주택가에 자리를 잡았다. 아파트가 아닌 주택가에 위치한 어린이집은 세대 수에서부터 불리했다. 주택과 주택 사이에 자리해 홍보효과도 미미했다. 그러나 맨발로라도 언제든 밟을 수 있는 앞마당이 있고, 굵직굵직하고 튼튼하게 지어진 주택은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가뭄에 움트는 새싹처럼, 아주 천천히 아이들이 늘어났다. 아이들에겐 조금씩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다. 결손가정이거나 가정형편이 몹시 어렵거나. 어떤 아이는 월요일 아침에 등원하면 일단 목욕부터 시켜야 했다. 몸은 지쳤지만 그녀는 즐거웠다. 아이들은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정성으로 보살피는 그녀에게 주는 부모들의 신뢰는 든든했다.

어린이집에 장애아동의 상담이 들어왔다. 아이는 단순한 발달장애가 아니라 앉거나 누워만 있을 수 있을 정도로 몸이 많이 아팠다. 장애아동은 12살까지 어린이집에 있을 수 있다. 원장은 아이를 12살까지 보살피게 된다.

비장애아에게 더 좋은 통합교육

다른 아이(동생)들이 놀이나 학습을 하는 동안 아이는 특수의자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거나 잠이 들었다. 일손이 빠듯한 중에도 원장은 직접 아이를 맡아 일대일로 이야기를 해주거나 나름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 눈에는 언제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이 참으로 좋았다. 자신도 모르게 가래를 뱉어놓는 아이 때문에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씻기고 닦고 입혀야했지만,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아니면 누가…’ 하는 책임감과 사랑이 포기하지 못하게 했다.

때론 장애아동이 있는 것을 보고 입소를 꺼리는 부모도 있었다. 화들짝 놀라서 가거나, 다시 연락이 없는 경우였다. 그러나 세 차례의 방문 끝에 남매를 맡긴 한 어머니는 얼마 지나 전화를 걸어왔다. 남달리 똑똑하고 영재성이 있으나 무척 이기적이었던 아들이 달라졌다고.

사연인즉, 아들과 함께 소아과에 갔다가 약국에 들렀는데, 선물로 받은 비타민제를 주머니에 소중히 넣어두더라는 것이다. 왜 안 먹느냐는 엄마의 질문에 아이는 멋쩍은 듯 웃었다.

“형아 갖다주려고.”

“형아?”

“은환(가명)이 형아. 이거 먹고 빨리 나으라고.”

어머니는 눈물이 왈칵 날 뻔했다고 했다. 반신반의했던 통합교육이, 장애아보다 다른 아이들에게 더 좋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고도 했다. 원장도 눈물이 났다. 그 아이뿐 아니었다. 아이들은 등원하자마자 은환이에게 달려가 뽀뽀부터 했다. 자신들의 놀이에 끼워놓고 말을 건네기도 했다. 원장은 그렇게 예쁜 마음이 맑은 샘물처럼 솟아나는 아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래도 가끔 은환이가 너무 아프거나 심한 가래로 끅끅거릴 때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상태가 더 나빠질까봐서였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어머니도 아는 듯 언젠가 길고 긴 손편지를 보내왔다. “우리 아이가 혹시라도 나쁜 일이 생길까봐 걱정하신 것 다 알고 있어요. 그런 걱정이 주는 부담까지도…”라고 시작된 편지는 그녀의 눈물·콧물을 빼놓았지만, 다시 또 힘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아이는 이제 12살이 넘어 다른 장애시설로 가게 되었다. 그녀는 가끔 아이의 어머니에게서 전화를 받는다. “아이의 눈에 생기가 없어졌어요”라고. 장애가 있는 이들을 보살핀다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고, 움직이는 것도 어려우므로 대부분의 시설에서 장애아들은 정적으로 생활하게 된다. 눈앞에서 아이들이 힘차게 뛰어놀고 곧잘 말을 건네던 어린이집을 아이가 얼마나 그리워할까, 생각하면 그녀는 지금도 눈물이 난다.

하루하루 달라지고 예뻐지는 아이들

또 다른 아이도 있었다. 발달장애가 있던 아이는 아무 데서고 소리를 지르고 뒹굴었다. 소변이 마려워도 화장실에 가기 싫다며 몇 시간이고 울다가 겨우 소변을 누고 나서야 그치던 아이. 벽에 붙여둔 예쁜 게시판을 몇 번이고 망가뜨려 밤새워 다시 만드는 일도 많았고, 야외학습을 나갔다가 몇 시간이고 바닥에서 발버둥쳐 다른 선생님과 합심해 겨우 안고 나온 일도 있었다. 그녀는 아이가 단 1분도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병원에서도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그녀는 작정을 하고 아이와 일대일 교육을 시작했다. 아이 수준에 맞춘 흥미 위주의 수업이었다. 이야기도 나누고 그림도 그리고 만들기도 했다.

최영신 원장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아니면 누가…’ 하는 책임감과 사랑이 통합교육을 포기하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녀가 아이들에게 간식을 먹이고 있다. 한겨레21 이종찬

최영신 원장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아니면 누가…’ 하는 책임감과 사랑이 통합교육을 포기하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녀가 아이들에게 간식을 먹이고 있다. 한겨레21 이종찬

아이가 처음으로 40분을 앉아 있던 날, 그녀의 가슴에 요동치던 감동과 환희를 잊지 못한다. 아이는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달라졌다. 올해 아이는 유치원으로 갔다. 가끔 아이 할머니가 전화해 하소연을 하지만, 잘해낼 것이라는 믿음이 그녀에게는 있다. 그리운 마음과 함께.

올해는 발달이 조금 느린 아이 한 명과 다문화가정 아이가 함께하고 있다. 그녀는 올해가 가장 심신이 편하다고 너털웃음을 짓는다. 발달이 느린 아이는 사랑으로 감싸고, 다문화가정 어린이는 어울림 교육에 초점을 맞춘다. 둥그렇게 맑은 눈이 예쁜 아이는 다른 다문화가정 아이보다 인지 발달이 빠르지만, 복합적인 한글의 이해력은 조금 늦다. 그녀는 다문화지원센터와 연계해 개별지도를 받게 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예뻐지고 달라진다.

고사리 손의 도움도 귀하게 여기는 형, 친구, 동생과 어울리는 아이들 역시 덩달아 성장한다.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를 배우는 것이다.

마당에서 놀던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녀가 빠끔히 내다보니 아이들은 개미를 두고 장난 중이다. 다른 아이는 나뭇가지 하나를 소중히 들고 지렁이를 찾으러 다닌다. 맨발인 아이도 있다. 들어오면 또 한바탕 씻기고 먹이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즐겁다. 아이들이 즐거우니 선생님들도 즐겁고 모두가 즐겁다. 그것이 아이들에게 바라는 그녀의 유일한 바람이다. 이곳에 오는 하루하루가 즐겁고 신나는 것! 그것이 곧 행복이므로.

몇 해 전, 유난히도 어린이집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던 어머니들이 있었다. 그런 아이들이 모두 다섯. 어머니들의 성화로 가정어린이집임에도 7살 반까지(보통의 가정어린이집은 4살 반까지 한다) 운영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의 졸업을 앞두고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아이들에게 재롱잔치의 추억 하나는 만들어주고 싶었다. 선생님들 모두 의기투합했다. 졸업하는 아이가 다섯뿐이고 형제가 다니는 아이들도 많아 부모님 수가 많지 않았다. 고민 끝에 요양원에 협조를 구했다. 외로운 어르신들과 함께하는 일종의 위문공연 겸 재롱잔치였다.

어르신들은 아이들의 귀여운 몸짓에 환한 미소를 지었고, 한데 어우러져 흥겨운 춤사위까지 선보였다. 그렇게 성공적인 재롱잔치를 끝내고 아이들은 모두 졸업했다. 졸업식 날, 집에 돌아간 어머니들이 전화를 했다. “이곳을 어떻게 떠나죠”라고. 수화기를 붙잡고 서운한 마음에 함께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가 준 긍정과 믿음의 힘

그 모든 하루와 감동과 말씀과 기도가 이 일을 해올 수 있는 힘이고 원천이었음을 그녀는 안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고난 중에도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린 적 없는 어머니의 긍정과 믿음과 소망을. ‘꿈꾸는 소녀’라는 별명답게 그녀의 어머니는 아직도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뤄가고 있다. 그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실내로 화사하게 퍼져오는 것을 느끼며,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그린다.

이 모든 하루와 사랑이 바탕이 되어 더 넓고 깊은 사랑의 통로가 되고 싶은.

아이 한 명이 뛰어들어와 와락 안겼다. 마당가에서 주운 낡은 장난감을 들고서. 조금 부족하고 낡은 것도 소중히 할 줄 아는 아이들이 있어, 그녀의 가슴엔 오늘도 하늘색 풍선이 둥실둥실 떠오른다.

전주=글 김소윤 제2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사진 이종한 선임기자 r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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