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원래 인터뷰를 하려고 한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을 인터뷰해야 재미있을까 막막하기만 해서 주위의 인맥을 쥐어짜고 있었다. 매번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꺼내면서. “저기, 있잖아, 주위에 좀 독특한 사연 있는 사람 없어?(사이코패스, 변태, 엄친아·딸 빼고)” 십시일반으로 모인 술 냄새 밴 사연은 대부분 이러했다. 에 제보해야 할 만큼 기구하고 살벌하거나, 을 연상시키는 단물 빠진 감동뿐이거나. 어느 쪽이든 썩 내키지 않았다. 후배 J를 만난 날에도 그리 기대는 하지 않았다. 습관처럼 그저 질문했을 뿐이다. J는 양념치킨의 살점을 발라내며 잠깐 침묵하더니 자기의 전경 복무 시절 선임이었다는 ‘그’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와 의 양축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좌표의 이야기를. 그리고 나는 며칠 뒤 저녁, J와 함께 ‘그’를 만났다.
그의 이름은 박재민이다. 간결하게 ‘박군’이라고 부르자. 박군은 26살의 대학생이자 초보 타투이스트(문신의 도안을 만들고 사람 피부에 문신을 새기는 전문 직업인)다. 거기다 한 가지 더. 인도네시아에서 8년을 살다 왔다. 박군을 만나기 전에 J는 “그 형네 인도네시아 저택에는 하녀도 둘이나 있대요”라고 했다. 가사도우미도 아니고 무려 진짜 하녀를 두고 살았다니, 드라마 의 구준표냐, 아니면 영화 의 이정재냐, 이 무슨. 저녁을 먹으러 간 레스토랑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지금 이게 오늘 첫 끼니예요”라고 말하는 그의 태도만 보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나는 “혼자 밥 먹어야 할 때는 귀찮아서 자주 굶어요”라는 그의 말이 왠지 안쓰러워 마지막 한 조각의 피자를 양보했다.
박군은 열두 살 무렵 한국을 떠나 인도네시아에서 살게 되었을 때 그리 슬프지 않았다고 한다. 이민을 간 게 아니어서 국적은 여전히 대한민국이었다. 철딱서니 없는 어린 나이라 그랬는지 상실감보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고모부 가족이 이미 인도네시아에 터를 잡고 있었다. 박군의 아버지는 고모부와 함께 인도네시아에서의 첫 번째 사업을 시작했고, 박군은 고종사촌들과 놀았다. 새로운 터전은 언제나 여름이었다. 박군은 국제학교에 입학해 영어로 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학교에는 한국 아이가 많았다. 거의 늘 그들과 어울렸다. 영어와 한국어 둘 다 늘었다. 학창 시절에 주로 뭘 하면서 놀았느냐니까, 박군이 말했다.
“학교에서 밴드부도 했고요. 같이 노는 패거리 비슷한 게 있었어요. 국제학교 한국 애들끼리 몰려다니는. 그냥 생각 없이 놀았죠. 뭐가 되고 싶다던가, 그런 구체적인 생각이 별로 없었어요. 현지 애들이랑 시비 붙어서 자주 싸우러 다니고, 뭐….”
“그럼 재민씨, 그 애들이랑 오토바이도 타고 그랬어요?”
“아뇨. 오토바이 같은 건 안 탔어요. 다들 기사가 항상 차로 데리러 와서.”
“어우, 뭐야. 진짜 완전 도련님이었네요?”
“거기 물가가 워낙 싸서 가능한 거죠.” 그는 겸연쩍다는 듯이 웃었다.
아버지는 짤막한 막대기 모양의 고구마 스낵을 만드는 공장을 차려 사업을 궤도에 올려놓았다. 지금도 거기에서는 수많은 황금빛 고구마 스낵을 만들어 각국으로 수출하고 있다. 어린 박군은 일가가 고구마 스낵으로 이룩한 유복함을 누리며 타국에 쉬이 적응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역사나 경제·정치 분야의 사정은 거기 살 때나 지금이나 잘 모른다. 나는 인도네시아에 대통령이 있다는 걸 알지만 일부러 맹한 척 질문했다.
“재민씨, 인도네시아는 누가 집권해요? 왕인가, 대통령인가? 총리가 있나?”
그러자 박군은 어물거리며 확답을 피했다. 그런 데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그다지 알 필요도 없는 나이였고. 부모님은 박군이 한국의 대학으로 진학하기를 바랐다. 군대도 가야 했다. 어찌됐든 박군은 결국 한국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곧 떠날 이방인답게, 자기가 알든 말든 별다른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 것들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지녀야 편했을 것이다.
발리에서 생긴 일“정말 꿈이 없었어요. 막연하게 Y대 경영학과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해외에서 오래 살다 온 아이들만 뽑는 특별전형으로. 그런데 경영학과 가는 건 꿈이 아니잖아요. 어떤 사람이 되고 무슨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그런 게 꿈이지.”
맞는 말이다. 아, 너무 옳은 말이라 요즘 대한민국에서는 오히려 판타지에 가까운 말이다.
“그러다 고등학생 때 발리(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휴양지)에 갔는데요. 발리에서 작업하는 주얼리 디자이너의 작품전을 우연히 보게 됐어요. 그걸 보니 나도 저런 거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얼리 디자인.”
하고많은 것 중에 왜 하필이면 목걸이나 귀고리 같은 장신구를 디자인하는 일에 매료된 걸까? 도대체 어떤 작품전이었는지는 몰라도, 한 소년의 메마른 가슴팍을 ‘나도 저 사람처럼 저런 걸 하고 싶다’는 최초의 열망으로 적셔줬다는 점에서 그건 분명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박군은 한국 드라마의 전형적 캐릭터인 ‘경영학을 공부하고서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아 인생 거저먹는 도련님’이 될 수도 있었다. 발리에서 별일 없이 놀고먹기만 하다 왔다면 말이다. 뇌하수체를 관통하는 깨달음은 대체로 교통사고나 밤손님처럼 들이닥친다. 주얼리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결심한 그는 부랴부랴 1년을 준비했다. 그리고 서울의 모 4년제 대학 공예학과에 합격했다. 원래부터 손재주가 있었던 게다. 뒤늦게 발견한 재능 덕분에 드디어 8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살게 되었다. 고모네 집에서. 그 얘길 듣고 “얹혀사는 거네요?”라고 장난조로 물으니, 박군은 “그렇죠, 얹혀사는 거 맞아요”라며 냉큼 인정했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여전히 인도네시아에 산다. 하녀와 운전기사가 딸린 저택에서. 예전에 박군이 8년간 누렸던 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록 끼니를 이따금 거르고 대중교통으로 다니고 모국의 추위에 아직도 적응 못하고 있지만, 박군은 행복하게 살아나가는 것 같았다. 문신을 공부하고 연애도 하면서. 자,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 것이다. 어쩌다가 주얼리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던 청년이 타투이스트로 목표를 수정했나? 그 과정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font size="4"><font color="#008ABD">문신과 박군의 만남</font></font>
<font color="#1153A4">인생에서 귀인의 중요성</font>
1. 대학 2학년 2학기 이후 휴학하고 전남에서 전경으로 복무 *비고: 예전부터 문신에 대한 호감과 관심이 어렴풋이 있었음(잠복기).
2. 제대 뒤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귀인을 만남 *비고: 귀인의 정체는 밴드도 하고 타투이스트 활동도 하는 사나이.
3. 귀인을 통해 별 거부감 없이 문신의 세계에 입문 *비고: 서서히 귀인을 비롯한 여러 타투이스트들에게 문신을 시술받음.
4. 마니아의 길을 거쳐 어느덧 타투이스트가 되려 결심 *비고: 귀인을 사부로 추대함. 박군 부모님 입장에서는 귀인이 원수.
5. 사부가 일하는 타투숍의 막둥이가 되어 수행을 시작함 *비고: 사부와 박군 간에는 수강료나 월급 명목의 상호 간 금전 지급이 없음.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그리하여 박군은 몇 달째 막둥이로 도제식 교육을 받고 있다. 문신을 새기는 연습은 돼지껍데기나 무의 표면에다 한다. 얼마 전에는 진짜 사람의 피부에 문신을 시술했다. 타투이스트로서의 첫발자국을 막 뗀 셈이다. 곧 명함도 만들 생각이다. 인도네시아의 부모님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문신을 새긴 것도, 문신을 새겨주는 사람이 된 것도. 거짓말할 마음은 없다. 언젠가는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만약 이 인터뷰 때문에 부모님이 알게 된다면, 뭐 어차피 말해야 할 거 좀더 일찍 자연스럽게 알린 셈 치면 된다(나는 진짜 괜찮으냐고 연거푸 물어보았고, 박군은 정말 괜찮다고 배짱 좋게 대답했는데, 걱정된다).
그의 몸에는 현재 6개의 문신이 있다. 왼쪽 가슴팍 윗부분, 오른쪽 골반, 오른다리에 각각 하나씩. 그리고 왼다리에 3개. 옷을 입으면 전혀 안 드러나는 위치들이다. 팔과 등은 일부러 비워뒀다. 언젠가 채울 작정이다. ‘6개의 문신’은 한 개인에게 ‘6번의 사업 실패’ ‘6마리의 고양이 보유’ ‘6번의 성형수술 경험’ 같은 프로필과는 전혀 다른 범주의 개성을 부여한다. 그 이유는 문신이 가진 특수함 때문이다. 문신은 명품 가방처럼 돈만 있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성형수술처럼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고양이처럼 남에게 잠시 맡기거나 슬쩍 내다버릴 수 없다. 박군의 설명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① 마취를 안 하니까 순전히 자기 힘으로 견뎌내야 한다(인내)
② 색을 진하게 내려고 찌른 데 또 찌르기도 하니까 아픈 데 또 아픈 걸 참아야 한다(독기)
③ 수작업으로 일일이 살갗을 바늘로 찔러 속에다 색을 입혀야 하므로, 일정 기간을 두고 규칙적으로 방문해 알맞은 양만큼 천천히 진행한다(인내+독기+거기다 성실함까지 필요함).
멋으로 하나 해볼까 하기에는 진저리 나도록 혹독하다. 중도에 포기하고 미완성인 채로 살아가는 손님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참고 하는 사람이 많으니 신기하다. 자신에게 중요한 어떤 의미를 눈에 보이게끔 영구히 새길 수 있다면 그런 고통쯤은 참을 수 있는 건지, 아니면 그 고통을 견디는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두는 건지, 모를 일이다.
고통의 끝에 따라붙는 편견문신을 새기는 건 고통뿐만 아니라 사회적 편견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앤절리나 졸리도 했고, 영웅재중도 했고, 아무로 나미에도 했고, 조니 뎁도 했고, 노홍철도 했다. 그렇다고 문신이 쌍꺼풀 수술만큼 이미지가 말랑해진 건 아니다. 불량해 보인다, 연예인은 괜찮지만 내 사람 내 가족은 하면 안 된다, 그런 색안경에서 누군들 완전히 자유롭겠는가. 문신을 업으로 정한 박군조차도, 여자친구가 자신만큼 문신을 많이 하고 싶다 나서면 말리겠다고 털어놓더라.
“재민씨 여자친구는 문신 좋아해요?”
“싫어해요.” 그는 씩 웃었다. 왼손 약지에 낀 반지가 반짝 빛났다. 직접 깎아 만든 커플링이다. 안쪽에는 서로의 영문 이니셜도 파 넣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이브에 여자친구와 사이좋게 나눠 꼈다. 주얼리 디자이너를 꿈꿨던 청년답다. 첫 꿈은 내려놓았지만 어쨌든 그는 지금도 공예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몸에 직접 하는 공예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문신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 그런가? 나도 하나 새기고 싶어졌다. J는 이미 한참 전에 마음을 정해두었는지, 박군이 등뼈를 따라 긴 문신을 새겨주기로 했다는 소리를 했다. 할 이야기가 다 떨어진 박군은 커피숍의 테이블 아래로 슬쩍 오른다리 문신을 보여주었다. 휴대전화에 저장해둔 문신 관련 사진들도 보여줬다. 도안 새기는 연습을 해놓은 통통한 무 사진이 많았다. 착실하게 공부하고 있구나, 정말. 인터뷰를 마칠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문신을 한다면 재민씨한테 부탁하고 싶다고. 그러니까 꼭 좋은 타투이스트가 되었으면 한다고. 박군은 감사하다고 답했다. 그의 엄한 아버지가 한국으로 날아와서 박군의 문신을 레이저 시술로 모조리 제거한 뒤 인도네시아로 다시 끌고 가는 불상사가 닥치지 않기를 빌어야겠다.
글 한혜경 제1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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