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신문 국제면 한켠의 사진과 기사가 눈길을 잡았다. 법복을 입은 판사들이 거리시위를 하는 사진과 함께 ‘프랑스 판사들 파업’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판사들이 전국적 차원에서 업무를 거부하고 시위에 나선 것은 초유의 일”이란다. 우리에겐 그야말로 낯설고 놀라운 풍경이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강력범죄에 대한 사법부의 대응이 미온적이라고 비판한 게 도화선이 됐다고 하는데, 그 자세한 내막보다는 ‘판사의 파업과 시위’라는 겉모습이 더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무리 “집회·시위가 일상화된 프랑스라지만” 판사들이 재판 진행을 거부한 채 펼침막을 들고 떼지어 거리로 나서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건 상상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요즘 외신 중에는 이와 극과 극을 이루는 이야기도 종종 등장한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의 우간다 정부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날 것을 우려해 ‘이집트’ ‘무바라크’ ‘독재자’ 등 중동·북아프리카의 민주화 바람을 연상시키는 단어가 들어간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차단하도록 했다고 한다.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일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원리와, 국가 안보와 공공질서를 위해서라면 국가가 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충분히 제약할 수 있다는 원칙을 함께 내면화하고 있는 대한민국 시민은 우간다 정부의 행위를 두고 황당하다는 웃음과 동시에 묘한 기시감에 젖은 표정을 지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또 다른 뉴스를 접하며 그 표정은 단호하게 변할 것 같다. 지난해 5월 한국을 방문했던 프랑크 라뤼 유엔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이 작성한 보고서가 공개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한 2008년 이후 한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크게 후퇴했다며 개선을 권고하는 내용이다. 유엔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이 우리 정부에 이런 권고를 한 것은 16년 만이라고 한다. 그 16년 동안 세계에서 인터넷 인프라가 가장 좋은 나라를 만들고도 인터넷상 의사·표현의 자유 제약을 지적당하고 있는 게 우리의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표현의 자유는 국제사회에서 한 나라의 자유도를 셈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의 하나로 여겨진다. 표현의 자유가 만개한 나라는 민주국가다. 그러나 늘 들썩거림으로써 자유와 민주주의를 더 다진다. 반대로 표현의 자유가 억눌린 나라는 독재국가다. 켜켜이 쌓인 민중의 분노가 한꺼번에 분출해 그 독재체제를 무너뜨리고야 만다. 생각해보면, 민주국가든 독재국가든 불온한 말들을 싫어하는 것은 권력자의 고유한 특성일 것이다. 사르코지도 판사들의 시위를 싫어할 게 분명하다. 다만 권력이 그 속내를 마음속에만 품고 있느냐, 드러내놓고 말하느냐, 물리력을 써서 관철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떤 태도를 취하고 이를 어떻게 제도화하느냐에 따라 국격이 갈린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판사들의 시위를 촉발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프랑스의 도도한 자유를 세계에 알렸고, 요웨리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통제함으로써 독재체제가 무너질지 몰라 불안해하는 부끄러운 내면을 만방에 고백했다. 선택은 극과 극이다. 우리는 파리행 비행기에 오를 것인가, 아니면 캄팔라를 향해 사막과 밀림을 헤맬 것인가. 유엔 보고서를 받아든 이명박 대통령의 선택을 묻고 싶다.
한겨레21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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