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다 외우기 힘들 정도로 많은 걸그룹이 자고 일어나면 생겨난다. 점점 어려진 연령을 자랑하며 ‘소녀’들이 넘친다. 화사한(?) 삼촌 팬들의 양지와 달리 원조교제라는 음지의 세계가 거론될 때도 우리는 ‘소녀’를 떠올린다. 일반 다수가 갖는 소녀의 이미지와 그 소녀들의 이미지가 같은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소녀는 이 시대에 그렇게 살아남아 있다. 아, 그러고 보니 시대의 획을 그으며 광장을 점했던 캐릭터, 촛불소녀도 빼놓을 수 없겠다.
그 많던 소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렇다면 소년은? ‘해에게서 소년에게’ 운운하던 멀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소년’으로 시작하는 신문과 잡지가 있을 만큼 소년이란 말이 흔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아이돌 그룹과 꽃미남이 건재한 오늘, 마주치고 스치는 아이들에게서 새삼 ‘소년’의 모습을 찾아보려 애쓰더라도 찾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것이 지극히 주관적인 소년이라는 이미지이든 막연한 자기 연상이든 그렇다. 그 많던 소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즈음 떠오르는, 아직은(?) 남아 있는 소년이 있다. 일단 이 친구, 소년이라는 호명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은 지났으니 ‘꼬마’도 아니고, 학교를 다니지 않으니 ‘학생’이라 부르는 것도 맞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신영(14)이라는 이름의 이 친구는 ‘소년’에 딱 들어맞는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 우리는 얼핏 두세 가지 정도를 생각한다. 지긋지긋한 공교육의 폐해로 상처 입은 어린 영혼이거나, 제도와 규율을 넘어서는 진취적이고 용감한 대안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든가, 부모가 운동권이었거나 사회참여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짐작들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의 세 가지 모두 아니었다. 중학교 진학을 왜 하지 않았느냐는, 수없이 들었을 식상한 질문을 피하고 싶어 이렇게 시작했다.
-어른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1위는, 아니 3위부터 말하면 “어디 가?”, 2위는 “왜 학교 안 가?”, 1위는 “머리는 왜 기르나?”.
3위도 재미있지만, 학교를 다니지 않는 것보다 14살 남자아이가 머리를 기르는 것을 더 이상하게 여긴다는 것, 일단 의외다. 청학동 댕기머리처럼 유난한 길이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소년의 헤어스타일은 세련된 정도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아이들 문제에 열과 성을 다하는 것에 자신의 인생을 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대한민국의 어른들에게 14살 남자아이의 긴 머리는 그만큼 희귀하고 용납이 어려운 일인 모양이다. 가볍고 간단하게 입을 풀고자 던진 질문이었는데 무언가 좀 찔렸다.
-그런 잦은 질문에 답하는 나름의 대처 방법이 있을 것 같다.
=처음에는 오래전부터 머리를 길러왔고 (손으로 어깨쯤을 표시까지 해가며) 이 정도까지만 기르려고 한다고 이해(?)를 구하듯이, 약간 잘못한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성의껏 답했다. 서울은 물론이고 1년 전에 이사 온 시골에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거의 한 번 이상은 그 질문을 하니까 언젠가부터 성가셨다. 예를 들면 어른들은 빼고 우리 마을 중고생 친구, 형, 누나들이 한 번씩만 물어도 같은 질문이 15번을 넘는다. 처음에는 자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냥’이라고 대답한다.
어른들의 질문에 아이들의 대답이 아주 짧거나 무성의하게 유독 ‘그냥’이 많은 이유를 실감했다. 서울 태생인 소년과 역시 서울에서 나고 자란 부모님은 소년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지금 살고 있는 경북 상주 속리산 기슭으로 이사했다. 1년 전 일이다. 오래전부터 부모님이 시골살이를 얘기해왔고 서울 생활을 하면서 여름휴가나 방학을 이용한 가족 여행을 할 때 여러 곳의 시골 마을을 다니며 정착할 만한 곳을 살폈다. 긴 시간 가족 간의 공감과 마음의 준비를 해온 셈이다. 벼르던 질문을 던졌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이유는?=2월에 이사를 왔는데 이사 온 집이 폐허 수준에 쥐구멍이 그대로 있을 만큼 엉망이어서 우선 집 수리 등에 일손을 보태고 싶었다.
당황스러운 대답이다. 부모가 아이의 진학 일정에 맞춰 이사를 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혹시 사정이 시기적으로 여의치 않더라도 아이가 낡은 집 수리를 이유로 진학을 미루는 것을 천연스레 얘기하다니. 마치 짬뽕을 먹을까 자장면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다른 일 좀 하고 조금 있다 먹자고 하는 것처럼, 그러다가 다른 일을 보고 났을 때 짬뽕이나 자장면 중 하나이거나 또 다른 것이 생각나 선택하는 것처럼 별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투였다.
이사 직후라 안팎으로 모든 것이 낯설고 어수선한 상태에서 곧바로 일반 중학교에 꼭 진학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단다. 소년은 초등학교 저학년 동안은 일반 학교에 다녔다. 지극히 모범생이었고 살던 아파트의 친구들은 물론 학교에서의 교우 관계도 아주 좋았다.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소년에게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특목고 등을 적극 추천하며 준비에 들어갈 것을 권했다. 우수한 아이는 국제중이나 특목고 외의 대안이 없다는 현실과 그 종용에 회의가 생긴 소년과 부모님은 심각하게 진로를 고민했다. 초등학교 상급 학년이 되면서 대안학교로 진학했다. 많이 놀고 많이 배우고 즐겁고 새로운 일들이 매일 생겨났다. 소년의 말을 듣노라면 일반 학교와 대안학교를 나누어 한쪽이 좋다 나쁘다로 생각하는 것은 그저 어른들의 선입견이나 기우 같았다. 소년에게는 일반 초등학교도 대안학교도 웃음을 짓고 내내 이야기가 끊이지 않을 만큼 좋은 기억들이었다.
-일과가 궁금하다.=시골살이의 커다란 프로젝트는 산양 키우기다. 부모님이 시골에 오자마자 농사를 시작하셔서 나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계획했다. 소를 키울까 했는데, 덩치 면에서도 그렇고 소보다는 접근이 쉽고 우유도 나오는 산양을 키우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새끼를 분양받아야 길들이며 키우기 쉽다고 해서 근처 산양 목장에서 분양을 기다리는 중이다. 하루에 3시간씩 주로 아침에 일어나서 중학교 교과 공부를 혼자 한다. 4월에 고입자격 검정고시를 본다. 마을 가까이 있는 속리산 문장대를 오르고, 근처 중학교 운동장에서 농구를 한다. 농구 교본은 다. 만화로 볼 때는 몰랐는데 실제로 꽤 적중되는 게 많다. 좋은 교본이다. 문장대를 오를 때 많은 등산객을 만난다. ‘중년의 행복여행’이라는 모임 분들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재미있었다. 등산객에게 꼭 필요한 커피를 팔면 괜찮겠다는 웃긴 생각도 해봤다. 문장대는 국립공원이라 불법이기 때문에 장사는 할 수 없다. 그리고 강아지·토끼·닭을 키우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밥과 물을 챙겨주고 있다. 귀찮아서 빼먹고 싶은 유혹이 강한 일 중 하나다.
-학교를 다니지 않아서 가장 좋은 점과 그 반대는 무엇인가.=무엇보다 게임할 시간이 많아서 좋다. 24시간을 자율적으로 쓴다는 것이 가장 좋은 점이면서 단점이다(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단서를 달았다). 학교에서는 딱딱 정해진 걸 하면 되고 잘하면 상장도 받는다. 그런데 나는 혼자 계획을 다 짜고 정하고 행동해야 하는 점이 힘들다. 아무도 같이 해주거나 시키지 않기 때문에 중압감 같은 것이 있다. 그렇지만 스스로 노는 시간을 정할 수 있다는 점은 좋다.
-지금 생활에 만족한다면 다른 또래나 초등학생에게도 권할 만한가.=모두가 나처럼 지내는 것은 별로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게 좋은 것 같다. 모두 나처럼 긴 머리를 한다면 모두가 짧은 머리를 하는 것만큼이나 이상할 것이다. 시골은 부모님이 농사일에 매달려 있어서 그런지 방과 후에 초·중·고생 모두 학교에 잡아두는 시간이 길다. 서울 아이들이 학원에 시달리는 것과 비교해 시간상으로는 나을 것도 없다. 학교에 종일 잡혀 있는 여기 아이들도 도시의 학원에서 시달리는 아이들도 어른 탓만 하고 스스로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학원 다니기 싫다고 하면서 왜 학원을 다녀야 하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부러운 친구들은 별로 없었다. 나보다 더 생각이 자유롭거나 즐거워 보이는 친구가 드물다. 부러운 어른은 있다. 내 머리를 즐겁게 이발해주는 형이 있었는데 그 직업이 부러운 적도 있었고, 옆에 새로 생긴 젊은 부부의 가게와 경쟁해서 더 맛있게 떡볶이를 만들어 파시는 육칠십 살 된 할머니를 볼 때 생활이 윤택하지 않아도 부러운 느낌이 든 적이 있다.
-앞으로 계획이나 꿈이 있다면.=어릴 때 친한 친구들끼리 통나무집을 짓고 살자고 약속했는데, 지금은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는 현실을 안다. 노숙인에게 점심을 제공하는 ‘민들레국수집’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작은 식당을 하면서 지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싶다. 그렇게 일을 하고 얘기가 통하는 아내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가는 소박한 생활을 했으면 한다. 그때 나를 만인보 8224번째 인물쯤으로 인터뷰하러 찾아오는 걸 지금 막 생각했다. 재밌을 것 같다. 또 일러스트에 관심이 많아서 잘 그리고 싶고, 글도 곁들여 잘 쓰고 싶다. 강풀 만화도 좋고 이철수 판화도 예뻐서 좋아한다. 대안 고등학교에 진학할까 했는데, 비용이 비싸서 일반 학교 진학을 계획하고 있다.
-행복해 보인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공부를 안 해서 그런 거 같다.(인터뷰를 하는 간간이 계속 웃었지만 이 대답과 동시에 둘이 엄청 크게 웃었다.)
-공부를 안 하면 중고생들이 다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인가.=막상 공부를 하지 말라고 하더라도 하루이틀이지,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쓸지 모를 것 같고, 그래서 모두 행복해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중고생들이 학교에 10시간 이상은 매여 있는데 나는 3시간 공부하니까 행복한 건 사실이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건 일반적인 일이 아니다. ‘일반적’이라는 범주가 어디까지고 누가 정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은 불안하다. 사람들이 하니까 나도 해야 한다고 쫓기는 일들이 대부분 일반이 주는 안정의 힘 때문이다. 소년은 일반적이지 않다. 그런데 일반적인 선택을 한 학생들보다 더 안정적이고 자연스러운 힘이 느껴졌다. 일반을 뛰어넘거나 일반에 모자라는 무엇이 찾아지지는 않았다. 너무 평범한 소년이 지닌 힘의 실체가 궁금했지만 또렷한 답을 구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잃어버린 것조차 몰랐던 ‘소년’을 만나는 일, 커다란 의미 부여나 각이 서 있는 의지나 의식 없이 행복한 선택을 ‘그냥 했다’는 소년을 마주하는 시간은 흐뭇했다. 어느 정도 진지하고 꼭 그만큼 어른인 체를 하기 시작하는 모양이 웃기고, 우리가 아는 소년이 지녀야 할 만큼의 순함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지닌 소년은 행복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어른들이 소년을 어떻게 봐줬으면 하는지,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는지 물었다.
행복이 전염되길 바라는 소년“그냥, 저런 애도 있구나 해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는데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우리나라 어른들이 숨을 거둘 때 거의 다들 내가 왜 앞만 보고 살았나, 뭘 위해 살았나 후회한다는 걸 책에서 본 적 있다. 시사 주간지를 보는 어른들은 수준이 높을 것 같다. 한 사람이 행복하면 그 주변 사람도 행복하다. 을 보는 한 사람이 행복해지고 그렇게 계속 계속 행복한 사람이 늘어났으면 한다.”
상주=글 신수원 제1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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