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조가 가득한 청계천을 보고 있으면 서울의 신음 소리가 들린다. 지난 몇 년 사이 한국엔 참 많은 랜드마크가 생겼다. 거대한 콘크리트 어항도 생겼고, 모처엔 동양 최대의 유령 정원(가든파이브)도 생겼다. 또 앞으로 사계절 내내 관광자원으로 활용이 가능한 ‘4대강’이라는 ‘트래블(travel) 리버’도 생길 예정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양 최대·최고를 자랑하는 이런 랜드마크들이 오히려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망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설마, 기분 탓이겠지? 명문대를 나와서 엘리트 코스를 밟은 뒤 정치에 입문한 훌륭하신 분들이 뭔가 미심쩍은 짓을 할 리 없으니까. 그것도 자기들 돈도 아닌 세금으로 말이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만약 한 번이라도 이같은 생각을 한 경험이 있다면 이제 거두절미하고 여행을 떠나보자. 서울 곳곳에 위치한 ‘허구의 기념비’들을 한 바퀴 돌아보는 코스, ‘서울 투어스’다.
여기 하나의 지도가 있다. 앞에서 얘기한 서울 투어 지도다. 파란색 화살표로 골목골목의 동선까지 표시된 것이 꽤나 정성스럽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지도를 보고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이 지도를 만든 박은선(32)씨에 대해서다. 그녀는 무분별한 개발로 결핍의 상징이 돼버린 랜드마크를 돌아보는 여행을 기획했다. 조선시대 유물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청계천, 절반 이상 사라진 황학동 벼룩시장, 무속인을 쫓아내고 고층 아파트를 지은 인왕산 등 서울시의 무분별한 재개발 지역을 돌아보면서 역사와 문화 훼손의 현장을 직접 경험해보는 코스를 계획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 자체가 그녀의 예술작품이다. 제주도에 올레길이 있다면 박은선씨에겐 ‘서울 투어스’ 코스가 있는 셈이다. 한 작가가 지금의 작품에 이르는 길은 결코 고속도로가 아니다. 그 사이에는 많은 변화와 시행착오가 존재한다. 젊은 예술가인 박은선씨는 어떤 과정을 거쳐 ‘서울 투어스’라는 프로젝트에 이르렀을까? 서울 종로에서 그녀를 만나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서울 종로 조계사 옆에는 ‘모래’라는 이름의 컨테이너 공간이 존재한다. 지율 스님과 조계사가 4대강 문제를 놓고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자 만든 전시 공간이다. 그곳에서 젊은 예술가인 박은선씨를 만났다. 그녀는 큐레이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포스터부터 보여주었다. 포스터에는 4대강의 예전 모습과 현재 모습이 나란히 실려 있었다. 예전 사진은 초록이 무성한 반면 현재의 모습은 한눈에도 폐허처럼 보였다. 누군가는 현재 사진을 보고 아직 공사 중이니 폐허처럼 보이는 게 당연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박은선씨는 이대로 4대강 공사가 완공되면 득보다 실이 크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한국의 랜드마크를 허구 내지는 결핍, 한낱 위장술로 표현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만 그녀는 정치의식이 강한 사람이다. 무엇이 정치와 사회를 한 젊은 예술가의 작품 소재로 만들었을까?
시작은 평범했다. 우연히 미술학원에서 칭찬을 받고, 그것을 계기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돼 계속 그림을 그렸다. 미대에 입학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거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남들과 다른 점이 두 가지 있었다. 가난과 특전사 출신의 친오빠였다. 그녀는 정치적 작품 활동의 가장 큰 계기로 오빠의 이라크 파병을 들었다.
“산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빈부격차에 관심이 많았어요. 방 한 칸에 네 식구가 다 모여 살았으니까요.”
그녀의 작품 중 이 생각났다. 방 한 칸에서 네 식구가 고단하게 잠을 청하고 있는 설치미술이다.
“예고를 다녔는데, 몇몇 잘사는 집 애들은 벤츠로 등·하교를 하거든요. 왜 이렇게 빈부의 차이가 나는 걸까? 뭔가 불공평하고 문제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 거죠. 그러다 오빠가 이라크에 파병 가게 되면서 일종의 분노를 느꼈어요. 파병 반대 서명도 하고 시위도 하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는데 아무런 효과도 없었거든요. 개인의 무력함을 느낀 거죠.”
자본에 유린당하는 작가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그게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오빠의 이라크 파병을 계기로 사실주의적이었던 그녀의 작품은 급변한다. 강한 정치색을 띠게 된 것이다. 사슴이 무릎을 꿇고 자신의 녹용을 바친다. 토끼가 두 손으로 간을 건네고, 사람 얼굴을 한 인삼은 경례까지 붙인다. 국가가 강요한 개인의 희생에 대한 은유다(작품❶·❷).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가는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하기 위해 희생을 미화하고 고취시킨다. 이 시절(2005~2007) 그녀의 작품은 이해하기 쉽고 유쾌하다. 그러면서도 ‘희생의 은유’라는 점에서 어딘가 슬픈 구석이 있다. 이 ‘보양식’ 시리즈의 발단이 오빠의 이라크 파병, 즉 가족에서 출발했다면 이후 그녀의 작품은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건, 4대강 사업 등 민감한 사회적 이슈들로 확대된다(작품❸·❹).
한마디로, 그녀는 이 사회에 애정과 불만이 많은 사람이다. 그 감정과 사건들을 작품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사회적 이슈를 소재로 하는 그녀의 작품들은 과연 잘 팔리고 있을까? 예술가들의 직접적인 수입원은 작품 판매다. 작품이 갤러리를 통해 이른바 ‘큰손’들에게 팔려야 작가는 돈을 벌 수 있다. 당연하게도 정치색이 강한 그녀의 작품은 잘 팔리지 않는다. 팔리기는커녕 보관이 힘들어 소실된 작품도 있다.
“학교 다닐 때는 어떻게 하면 더 잘 팔릴까 고민도 했어요. 돈벌이에 대한 생각을 안 할 수는 없거든요. 한국의 전시 공간은 대안 공간, 미술관, 갤러리로 나누어져요. 미술관은 나이 많고 명성 있는 분들이 아니면 뚫을 수 없으니까, 대부분은 갤러리에서 전시를 해요. 그런데 갤러리는 너무 상업적이거든요. 돈벌이가 안 되는 작품은 전시하기가 힘들어요. 마치 돈벌이가 잘되는 작품이 더 뛰어난 작품인 것처럼 포장되거든요. 모두 불만은 있는데 대놓고 말은 못해요. 자본에 작가들이 유린당하고 소비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돈이 안 돼도 하고 싶은 걸 하기로 했어요. 주변을 보면 정치에 전혀 관심 없는 작가도 많아요. 그냥 자기 작품 하는 거죠. 그분들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런 분들도 필요하고, 저 같은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은 해묵은 논쟁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술가에게 사회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질문 자체에 의문을 갖는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사람도 있고, 박은선씨처럼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예술가도 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공격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길을 가는 것도 화합의 방법이다. 나는 그녀에게 팔리지 않는 작품을 만들고 있다면 생계 유지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되는 대로 산다”는 것이 그녀의 대답이었다. 한 달에 한 작품이라도 팔리면 좋은 거고 아니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시간강사로 현대미술 수업을 하고 있어서 굶어죽을 일은 없다고 했다. 사회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 불만을 대놓고 표현하는 사람은 적다. 사회적 불만을 고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더더욱 적다. 그녀는 이제 30대 초반이다. 나는 한국의 문화계가 저변에서부터 세대교체가 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의 작품은 점점 더 목소리가 커질 것이다.
“돈과 타협 않는 삶 자체가 예술”
“어떤 분은 정치적인 예술작품은 생명이 짧지 않느냐고 물어요. 전 그런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런 생각은 위정자들이 자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편리하게 분류하려는 욕망이라고 생각해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자본 취득을 목표로 하지 않는 예술가들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어요. 유행처럼 생명이 짧은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의 삶 자체가 바로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박은선씨는 자신을 ‘기인’이라고 표현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타협하지 않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모두 기인이다. 끝으로 그녀는 나에게 선물이라며 ‘서울 투어스’ 지도를 주었다. 곳곳에서 재개발의 폐해를 짚어내고 있는 이 지도는 일종의 ‘치부책’, 2011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기민호 제2회 손바닥 문학상 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