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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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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고 작은 곳이 준 삶의 위로

세 딸 데리고 11개월 동안 아시아 9개국 다녀온 진형민씨…

현지 NGO 거들고 주민들과 이웃하며 만든 소박하되 값진 여행기
등록 2011-02-09 17:19 수정 2020-05-03 04:26

말레이시아 페낭, 인도네시아 아체, 필리핀 민다나오, 동티모르 딜리, 네팔 포카라, 인도 매클로드간지…. 그녀가 세 딸과 함께 간 곳이다. 진형민씨는 11개월 동안 딸들과 아시아 9개국을 다녀왔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재난시 구호물품 배급 1순위’인 여자와 아이들이 1년 가까이 타지를 떠돈 것이다.

오래 머물기, 그들처럼

진형민씨는 여행지에 가서도 사람을 만나고 함께 일을 했다. 2009년 3월 아프간 난민 아이들을 위해 세워진 말레이시아 페낭 지역 힐라학교의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다. 둘쨋줄 오른쪽 첫 번째에 진형민씨의 막내딸 은승채양이 보인다. 진형민 제공

진형민씨는 여행지에 가서도 사람을 만나고 함께 일을 했다. 2009년 3월 아프간 난민 아이들을 위해 세워진 말레이시아 페낭 지역 힐라학교의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다. 둘쨋줄 오른쪽 첫 번째에 진형민씨의 막내딸 은승채양이 보인다. 진형민 제공

인터뷰를 하자고 하니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자신은 공정여행에 큰 뜻이 있는 사람도, 여행 전문가도 아니라고 했다. 어쩌다 보니 떠난 여행이다. 2009년, 어느덧 마흔이 되었고 지치고 힘에 겨운 자신을 보았다. 교사로 있던 대안학교를 정리했다. 쉬는 동안 무엇을 할까 하다가 고단한 자신에게 좋아하는 걸 해주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한 여행을 계획했다.

처음에는 혼자만 잠시 다녀올 계획이었다. 방송사 교양프로 PD인 남편은 자신도 이곳저곳 떠도는 게 일인지라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그런데 딸들이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들은 휴학이 자유로운 대안학교에 다녔다. 아이들까지 합류하니 일이 커졌다. 주변에서 걱정하기 시작했다. 아이들 학교까지 휴학하고 가는 여행이라고 하자 “진짜 엄마 맞느냐”고 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태연했다.

“제가 원래 계획을 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일단 저지른 뒤에 수습하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러니 아이를 셋이나 낳았지요.”

그리 말하며 그녀는 웃었다. 정한 기한도 없이 아이 셋을 데리고 무작정 아시아 각지로 떠난 그녀다웠다. 아이가 셋만 되어도 날개옷 입고 떠나지 못할 거라 안심하는 나무꾼도 있다던데, 그녀는 훌쩍 아이들을 끌어안고 타국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2009년 2월4일의 일이다.

그녀와 딸들이 찾은 곳은 주로 작고 한적한,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다. 몰락한 휴양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작은 마을을 돌아다녔다. 짧게 머무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에 들면 집을 구해 한두 달을 머물렀다. 한국인도 별로 없는 곳에서 어찌 네 여자가 살았을까 싶지만, 그녀의 생각은 간단했다. 어디서든 그곳 사람들처럼 살면 얼추 살아진다는 것이다.

그곳 사람들처럼 살았다. 저렴한 가정집을 구하고, 살림살이를 마련하기 위해 시장으로 갔다. 노점에서 물건을 흥정하고, 지역 산물을 사 이런저런 요리를 만들었다. 양념을 빌리거나 음식을 나누기 위해 옆집 문을 두드렸다.

식사를 마치면 아이들과 마을 구경을 다녔다. 길을 익히며 ‘버스정류장 근처 노점에서는 아침 요기에 좋을 옥수수 티베트 빵을 팔고, 인도 할아버지 슈퍼마켓에는 없는 게 없지만 쌀이랑 밀가루는 조금씩 덜어 파는 구멍가게가 더 싸다’는 걸 알아냈다.

현지 사람들이 말을 걸어오면 이야기를 나눴다. 지역 명소를 알려주면 그리로 갔다. 단골손님이 된 식당 구석에 앉아 여주인과 수다를 떨었다. 어떤 날은 집에서 손톱을 깎고, 책을 보고, 아이들 머리를 빗겨줬다.

별 계획 없이 떠난 여행의 유일한 계획은, 느리게 움직이고 사람들 속에 머무는 것이었다. 외지인이 북적거리는 관광지에서 풍광만 스쳐지나가는 여행은 하고 싶지 않았다. 쉬기 위한 여행이기에 느릿느릿 움직였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를 맺으려면 바삐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진형민씨에게 여행은 새로운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일상이다. 그녀는 여행지에 가서도 사람을 만나고 함께 일을 했다. 그곳에서도 아이들을 가르쳤다. 대안학교에서 일하며 ‘개척자들’ ‘이매진피스’ 등 국제 평화단체들을 알게 됐는데, 여행을 떠난 김에 그들 곁에 머물렀다. 현지의 단체들은 일손이 필요했고,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그녀는 아프가니스탄 난민 자녀들을 가르쳤다. 인도네시아 아체에서는 2004년 검은 쓰나미로 가족을 잃은 아이들을 위해 평화학교를 꾸리는 일을 도왔다. (평화운동단체 ‘개척자들’은 해마다 분쟁지역에 평화학교를 세워 현지 아이들에게 새겨진 타지역·타민족 간의 불신을 해소하려 노력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딸만 있다는 점을 앞세워 현지 ‘아들’들을 만들기도 했다. 아들 삼아 곁에 두고 잔소리라도 하고 싶은 고단한 아이들이었다.

더 건강하고 단단해진 딸들
같은 해 9월에 찾아간 인도 바라나시 강가에서 여자 뱃사공이 노를 젓는 보기 드문 모습을 만났다. 진형민 제공

같은 해 9월에 찾아간 인도 바라나시 강가에서 여자 뱃사공이 노를 젓는 보기 드문 모습을 만났다. 진형민 제공

엄마가 타국에서 다시 한번 교사가 되는 동안, 세 딸은 학생 노릇을 했다. 그녀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듯, 아이들도 각자 몫을 했다. 인도네시아 아체의 말링게 마을에 평화학교를 세울 때였다. 큰딸 써니(실제 이름은 승현. ‘써니’는 여행 당시 딸이 사용한 이름이다)가 중등부 수업을 받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다른 마을에 머물게 되었다. 속으로 걱정을 했지만 3주가 지난 뒤 딸은 더 건강하고 단단해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이가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늘 투덕거리던 모녀 사이도 한결 나아졌다.

“외국인 이모, 삼촌들 틈에서 밥 해먹고 일하고 지내면서 아이가 스스로 긍정적인 에너지를 갖고 온 거 같아요. 저도 끌고 왔던 피로, 시달림 등이 여행을 하며 많이 회복됐거든요. 더 넓은 곳에 가서 다른 이들과 함께 지내며 좋은 기운을 받은 상태에서 딸과 새롭게 관계를 맺게 된 것 같아요. 우리 둘의 사소한 문제들이 정말 사소한 문제로 느껴지게 하는 공간과 시간에 있었거든요. 더 크고 생활적으로 절실한 문제를 가진 사람들 속에서 있다 보니 저절로 우리 관계에 대한 문제가 정리된 것 같아요.”

그녀는 이유를 추측해본다. 새로운 관계는 기존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진형민씨는 인터뷰 내내 강조한다. 거창할 것 없는 여행이라고.

남들처럼 다녀왔다. 필리핀에서 말린 코코넛 속살을 먹고 인도 길거리에서 ‘차이’(홍차와 우유, 인도식 항신료를 함께 넣고 끓인 인도식 차)를 마셨다. 밥 먹듯이 연착하는 인도 기차는 그녀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갠지스강에서 쪽배를 탔고, 캄보디아에 도착해 앙코르와트 사원을 보러 갔다. 히말라야 트레킹도 놓치지 않았다.

네팔 여성들과 히말라야에서 떤 수다
그해 8월에 방문한 네팔 포카라의 실공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염색한 실을 뜨개질용 꾸러미로 만들고 있다. 진형민 제공

그해 8월에 방문한 네팔 포카라의 실공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염색한 실을 뜨개질용 꾸러미로 만들고 있다. 진형민 제공

다만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다를 뿐이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여성 가이드와 여성 포터들과 함께했다(네팔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기 위해 여성 가이드와 포터를 양성하는 사회적 기업 ‘세 자매 트레킹 여행사’를 통해 만난 이들이다). 여자끼리 걷는 길은 남달랐다. “길에 떨어진 꽃송이 주워 서로 머리에 꽂아주며 예쁘다 우습다 수다를 떨고, 맛있는 차를 마시면 무슨 차냐 어떻게 만드냐 얘기가 이어지고, 때때로 내 남편 네 남편 끌어다 남자들은 대체 왜 그런다니 흉을 보기도 했다.”

멀리 떨어진 타국이었지만, 그곳에서 만난 여자들은 우리네 모습과 닮아 있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같다는 말이 맞았다. 트레킹 가이드라는 자신의 일을 반대하는 남편과 마음을 부대끼며 사는 어린 주부를 만나기도 했고, 아이를 무료 탁아소에 맡겨두고 일을 나가며 불안한 눈으로 몇 번을 뒤돌아보는 엄마를 보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그 여자들을 품에 안고 토닥이기도 했고, 누군가와 닮은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기도 했다.

2009년 크리스마스 날 아침, 진형민씨와 세 딸은 자신들을 ‘남편(아빠)에게 주는 선물’이라 명명하며 집으로 돌아왔다(실은 가장 싼 비행기표를 찾다 보니 우연히 크리스마스에 도착했을 뿐이다). 여행을 다녀온 뒤 변한 점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세 딸들마저 “없다”고 대답했다.

“10년, 20년이 지나, 아 그때 여행이 내 인생에 이런 계기였구나 돌이켜볼 수는 있어도 당장은 여행 자체가 특별한 의미가 되진 않을 거예요.”

그녀에게 11개월의 여행은 그저 좋은 쉼이자, 다른 이들의 삶을 물끄러미 보며 얻은 위로일 뿐이다. 그녀는 여행을 하며 열심히 쉬었다. 그러나 부러워하는 내게 여행을 권하지는 않았다.

“여행은 내가 좋아서 선택한 나의 방식이지, 모든 사람이 여행을 할 필요도 없고 모든 사람이 여행을 통해 긍정적인 효과를 얻는 것도 아닌 거 같아요. 여행이 다 답은 아닌걸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으로 쉰 것이 여행이고, 사람들은 각자 좋아하는 방식으로 쉼을 가져야죠.”

여행은 그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여행 중이다. 한국에 돌아온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쉼을 좇고 자신이 갈 길을 찾고 있다. 이것을 여행이라 불렀다.

그녀가 가르치던 반 아이들 중에 다문화 가족 자녀가 있었다. 호의로 대하는 것은 곧 한계에 부딪쳤다. 다른 문화의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니 관계를 만들 수 없었다. 힘들었다. 조금이라도 그 아이를 이해해보기 위해 그녀는 반 아이들과 아시아 프로젝트 수업을 했다. 그 프로젝트로 맺은 인연이 그녀의 발길을 아시아로 향하게 했다.

여행 뒤, 티베트 난민 지원 NGO로
1년여의 여행 동안 진형민씨의 딸들은 더 건강하고 단단해졌다. 2009년 9월 인도 다람살라에서 포즈를 취한 네 모녀. 첫째딸 은승현양, 진형민씨, 둘째딸 은승빈양, 막내딸 은승채양(왼쪽부터). 진형민 제공

1년여의 여행 동안 진형민씨의 딸들은 더 건강하고 단단해졌다. 2009년 9월 인도 다람살라에서 포즈를 취한 네 모녀. 첫째딸 은승현양, 진형민씨, 둘째딸 은승빈양, 막내딸 은승채양(왼쪽부터). 진형민 제공

11개월의 아시아 여행에서 얻은 경험과 인연들로 그녀는 티베트 난민의 자립을 지원하는 ‘록빠’ 같은 비정부기구(NGO) 활동을 돕게 되었다. 록빠에서 운영하는 공정무역 상점인 ‘사직동, 그 가게’에서 자원봉사 활동도 했다. 그녀는 이제 가르치는 일을 멈추고 배운다. 요즘은 한 시민단체가 개설한 수업을 들으며 다문화 사회 인식 개선을 위한 인형극을 준비하고 있다.

여행은 그녀가 자신의 길을 찾아 디딘 한 걸음일 뿐이다. 길을 찾은 그녀가 긴 여행을 마치고 곧 돌아올 것이다.

윤희정 제2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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