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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난민



외딴곳에 갇힌 ‘컨테이너 난민들’…

불지옥 여름과 두려운 겨울 사이에 방치된 가난을 만나다
등록 2010-11-12 11:32 수정 2020-05-03 04:26
» 박순정씨는 5년 전부터 컨테이너에서 살았다. 이전엔 인근 천막에서 살기도 했다. 방을 보여주길 꺼렸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 박순정씨는 5년 전부터 컨테이너에서 살았다. 이전엔 인근 천막에서 살기도 했다. 방을 보여주길 꺼렸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치악산은 모른다. 산 언저리마다 물든 가난. 낡아빠진 단풍처럼. 재 넘어 오는 겨울은 두렵다. 강승준(65·가명)씨는 말했다. “지난해 겨울 같으면, 아주 난 진짜 밧줄 갖고 산에 가, 소나무 많겠다, 목매달아 죽으려고까지 작정했어요. 못 살겠더라고 정말. 살고 싶은 의욕이 추호도 없는 거여….”

바깥바람이 컨테이너 안으로 닥쳤다. 버릇없이 노인의 말을 잘랐다. 강씨는 허벅지 밑으로 손을 당겨넣었다. 올가을 들어 가장 춥다는 11월3일이었다. 강원도 원주 오리현마을 842번지. 주거지가 들어설 수 없다. 산자락이다. 그곳에 컨테이너 하나 앉아 있고, 그 안에 강씨 홀로 살고 있다. 올해로 7년째다. 가로 6m, 세로 4m. 세상이 노인에게 허락한 유일한 거처다. 일컫자니 ‘컨테이너 난민’이다.

장롱과 TV가 컨테이너 안 두 면을 두르고 남은 공간이 그의 잠자리다. 전기장판이 깔려 있고 그 위로 요가 놓였다. 컨테이너 공간의 3분의 1은 시멘트 바닥이다. 주방이고 욕실이며 빨래터다. 취재진이 그를 처음 찾은 11월2일, 가스레인지 위엔 식은 김치찌개 하나만 올려져 있었다. “오늘 한 끼도 먹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막걸리로 배를 채웠다. 3일도 정오까진 공복이었다. 그 김치찌개가 끓고 있었다. 훈기는 자잘하여 퍼질 리 없다.

강씨가 연탄난로를 만졌다. “허, 또 꺼졌네. 연탄가스 좀 나가라고 문 열어둔 건데.” 뱉은 말도 차가워졌다.

 

가로 6m, 세로 4m짜리 집
» 박순정씨는 5년 전부터 컨테이너에서 살았다. 이전엔 인근 천막에서 살기도 했다. 방을 보여주길 꺼렸다. 사진에 보이는 풍경이 이유다.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 박순정씨는 5년 전부터 컨테이너에서 살았다. 이전엔 인근 천막에서 살기도 했다. 방을 보여주길 꺼렸다. 사진에 보이는 풍경이 이유다.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여름은 불지옥이다. 한낮 달궈진 쇳덩이는 밤 11시까지 후끈거린다. 빗물이 샌다. 녹물이 방울져 떨어진다. 강씨는 빗물 받는 그릇 사이로 몸을 접고 눈을 감는다. 여러 날 칼잠이다. 올여름 장마가 시작되기 전 처음 비닐을 씌웠다. 이곳에서 강씨의 어머니도 함께 살았다. 더 고통스러워했다. 4년 전 기력이 쇠해 세상을 떠났다. 여든셋, 긴 가난을 마쳤다.

진짜 가난은 늘 어제가 낫다. 오늘이 어제보다 더 가난하기 때문이다. 강씨는 1945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강원도 원주로 이사왔다. 아버지가 원주에서 운전을 했다. 집을 팔아 개인 버스를 샀다. 당시로선 부자다. 거진까지 승객을 실어날랐다. 오는 길에 가족이 먹을 생선을 실어왔다. 얼마 못 가 버스에 불이 났다. 전 재산을 날렸다. “그야말로 운수(運數) 사업이더라고요. 그때부터 가난이 온 거야.” 노인은 쓰게 웃었다.

야간고 학생 때 지게를 메고 치악산을 올랐다. ‘아이스케키’를 팔았다. 나무도 져왔다. “다들 노는 일요일인데 난 쉴 시간이 없었어요.” 부모와 외할머니, 다섯 동생(여동생 셋·남동생 둘)이 한방에서 지그재그 잤다. 아버지는 강씨가 21살 때 입대하기 전 숨을 거뒀다.

강씨는 중학교 미술반이었다. 실력이 좋았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사진관에 취직해 사진 기술을 배웠다. 실력이 더 좋았다. 필름 원판에 칼을 대 대머리 손님의 머리칼을 그려주고, 눈 못 뜬 손님의 눈을 새겼다. 요즘 말로 ‘포토숍’이다. 오라는 사진관이 많았다. 밤낮없이 일했다. “여자들도 많이 따르더라고. 원주여고 학생들이 집에 가 밥 먹을 생각은 안 하고, (사진관) 의자에 가방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나 하나만 보는 거야. 난 일만 하는데.” 19살 임신한 여고생이 처가 됐다. 노인의 나이 21살이었다. 결혼 보름 만에 군에 입대했다.

사고치신 건가요?

(표정이 전혀 바뀌지 않은 채) 그렇죠. 결혼할 때가 아니었는데.

(한참을 웃고서) 그렇게 인기 좋고 실력도 좋았는데,왜 돈을 못 버셨어요?

(같은 표정으로) 그게… 돈이 모이지 않았어요.

 

추우면 떠오르는 밧줄의 악몽
» 강승준씨는 인물도, 실력도 좋은 사진기사였다. 그는 “컨테이너에서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막걸리와 담배가 마지막 벗이라고 했다.한겨레 원주=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 강승준씨는 인물도, 실력도 좋은 사진기사였다. 그는 “컨테이너에서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막걸리와 담배가 마지막 벗이라고 했다.한겨레 원주=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가난은 때로 설명되지 않는다. 아니, 그 설명이 너무 뻔하다. 춘천·목포·대구·부산 등지를 돌며 일했다. 원주의 대가족과 제 가정을 바라지하기에도 벅찼다. “평생 죽도록 남(사진관)의 돈만 벌어주고 그래 한 거지” “식구들도 많으니 난 정말 10원 하나 제대로 못 써봤어, 나 돈 정말 못 써봤어”라고 노인은 말했다. 아내는 결혼 10여 년 만에 편지 한 통만 써놓고 집을 떠났다.

마흔이 넘어 대구에서 시작한 식당이 실패했다. 점점 사진사로도 취직이 어려워졌다. 부산으로 가 막일을 했다. 아들 대학 등록금을 댔다. 1988년 원주에 있던 매부(건축업자)가 분재용 나무를 관리해보겠느냐고 제안했다. 야산 인근에 조립식 주택을 지어줬다. 그러나 사업이 잘 안 돼 매부도 쪼들렸다. 은행빚을 지면서, 큰 땅을 팔고 작은 터로 옮기고 옮겼다. 지금 강씨가 있는 곳이다.

강씨는 20여 년 동안 선친의 제사를 직접 모셔본 적이 없다. 지하수를 끌어올려 물을 쓴다. 한겨울에도 찬물이다. 화장실은 재래식이다. 1년에 두 차례 직접 퍼서 밭에 뿌린다. 그런데도 가난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지난해 말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다. 연탄난로를 올 10월 말 처음 구입했다. 8만원을 썼다. 한 달 생활비의 4분의 1이다. 바닥에 가스보일러가 설치돼 있긴 하다. “가스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 정말 추우면 한 번씩 튼다.” ‘정말 춥다’는 날은 ‘밧줄의 악몽’을 꾸는 날인가. 묻지 못한 기자는 손이 차고 발이 시렸다. 그도 떨면서 말했다. “겨울엔 추워서 못 있어. 겨울 잠바를 두 개씩 껴입고 있어도 귀가 시려 못 있어. 하루 종일 떠는 거야. 저 밑의 비닐하우스가 방보다 나아.”

동생들이 가끔 반찬을 갖다준다고 노인은 말했다. “(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해도 형편이 못 되니…”라며 말을 흐렸다. ‘가끔’의 빈도를 기자는 묻지 않았다. 대구 식당을 차릴 때 매부에게 빌린 돈을 강씨는 이제 10만원씩 갚는다. 다달이 기초생활수급비를 쪼갠다. “땅 다 팔면 딱 은행빚 갚는다고 해요. 그쪽 처지도 뻔히 아는데 안 줄 수가 없어요.” 상식은 가난을 감당 못한다.

노인은 말했다. “이래 살아서 뭐하나, 혼자 남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나라는 최근 노령연금(매달 9만원)도 주기 시작했다.

 

원주에만 30가구 50여 명이 살아
» 비주택 거주 유형별 환경만족도

» 비주택 거주 유형별 환경만족도

11월2~3일 원주에서 만난 가난은 끔찍하다. 냄새만으로 잔인하다. 컨테이너를 거주지로 삼는 이가 원주에서만 30가구(50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강원주거복지센터가 지난해 말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다. 그러나 이웃 상당수는 그들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한다. 취재진은 이틀 동안 컨테이너 난민 6가구를 만났다. 가난이 감춰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절반은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니었다. 다들 5년 안팎으로 한자리에서 삶을 버텨왔다. 오랫동안 곁에 있으나 철저히 시선 밖이다.

실제 국가인권위원회의 ‘비주택 거주자 인권실태 보고서’(이하 보고서)를 보면, 컨테이너 난민(움막·판잣집 등 포함 15가구)은 고립의 고통이 특히 심하다. 이들 중 주거지역에 위치한 이는 13.3%에 불과했다. 대신 외딴지역 40%, 농촌지역이 46.7%를 차지했다. 비닐하우스·고시원 등 각종 주거빈민의 거주 위치별 평균을 보면, 주거지 47.1%, 상업지 32.8%, 외딴지역 12.3%, 농촌지역은 3.4%였다.

보고서는 “(외견상 유사한) 비닐하우스가 예전부터 마을을 이뤄온 것과 달리, 컨테이너 등 거주자는 홀로 떨어져 있어 사람들 간 교류가 없고 외부에서 존재 자체를 알기 힘든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고립은 비문명적 풍경을 빚고 만다. 박순정(77·가명)씨도 컨테이너 난민이다. 강승준씨 쪽에서 20여 분 거리에 있었다. 마찬가지 부지엔 집이 들어설 수 없다. 무허가다. 양일에 걸쳐 박씨를 방문했다. 둘쨋날 취재진은 라면 한 상자를 준비했다. 노파는 인사를 던졌다. “쌀은 안 가져왔어요?”

컨테이너 안은 흡사 쓰레기 창고다. 온갖 폐품이 쌓아올려져 한 명만 겨우 지나고 누울 정도다. 전기도, 빛도 들어가지 않았다. 박씨는 “저녁엔 등잔불을 쓴다”고 했다. 왼쪽 발 절반은 터진 양말 밖에서 움직였다.

할머니, 겨울에는 안 추우세요?

많이 깔고 덮고 자면 돼요.

집 안 좀 봐도 돼요?

그런 거, 뭘 봐요?

물은 어떻게 드세요?

(바로 옆) 개울에서 떠다 마셔요.

그냥요, 안 끓이고요?

그냥 먹지요. 끓여먹어 뭐해요. 그런 건 염려 말아요.

하루 몇 끼나 드세요?

몰라요. 먹는 만큼 먹지요. 아무렇게나 먹지요.

오늘 아침엔 뭘 드셨어요?

호박죽요.

나라에서 받는 돈 있으세요?

그런 거 없어요. 품팔이 다녀서 번 돈으로 살아요. 근데 요새는 일이 없어요.

쌀 같은 건요?

(동사무소에서) 추석 때 10kg짜리 하나 주고 안 줘요.

 

수급권도 없는 컨테이너 독거노인

노파의 강원도 억양에 기자의 질문은 계속 맥 풀렸다. “뭘 자꾸 깐깐하게 묻느냐”며 노파는 야외 양동이에 채워진 물을 바가지로 퍼 들이켰다. 옆엔 낡은 솥단지가 있었다. 밑엔 타다 만 나무가 있었다. 마당에는 밭에서 떨어진 것만 주웠다는 고추가 널려 있었다. 함께 찾아간 강원주거복지센터 변상훈 사무국장은 “지난해에 처음 파악했는데, 정신장애가 조금 있으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씨의 의사표현은 대개 또렷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니다. 노령연금도 없다. 변 사무국장은 “주소지가 불분명해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애수당 수급자도 물론 아니다.

박씨는 한참 뒤에 컨테이너 안을 보여줬다. 가난이 불뚝 코끝을 찔렀다. 오래 볼 수 없었다.

그의 가난은 온전히 추적되지 않는다. 북녘 함흥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전 고종사촌 가족을 따라 월남했다.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29살 남편을 만났다. 헌병대 인사계였다. 결핵으로 숨졌다. 부부는 강원도 양구 3전차 부대 앞에서 다방도 운영했다. 30년 전 원주로 왔다. 아이를 낳았는데 몇은 죽었다. 아들 장아무개씨가 컨테이너를 마련했다. 박씨는 아들의 결혼사진을 보여줬다. 아들만 지난가을 마지막으로 노모를 찾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연락처는 갖고 있지 않았다. 올해 노파를 찾은 다른 지인은 없다고 했다. 바로 옆 개울엔 올여름 홍수에 뿌리 뽑힌 나무가 널브러져 있었다.

여기서 산 지 5년째다. 원시 생활을 닮았다. 건강·화재·수해 따위 위험 요소가 줄섰다.

영희(가명)는 10살이다. 엄마, 아빠 그리고 아빠 친구 둘과 2007년 4월 컨테이너로 이사왔다. 시내에서 얹혀 살던 집터가 팔렸다. 영희 가족은 산자락에서 개 사육을 시작했다. 버려진 컨테이너 두 개를 붙이고 밖으로 조립식 방 하나를 덧댔다. 다른 집을 구할 형편은 못 됐다. 엄마는 식당일도 나갔다.

이듬해부터 영희는 기침이 심해졌다. 감기를 달고 살았다. 엄마(차아무개씨·48)도 그랬다. 저녁이면 방바닥에 하얀 먼지가 수북했다. 손바닥에 묻어났다. 컨테이너 지붕 단열재에서 떨어졌다. 석면가루란 걸 안 지는 한참 뒤다. 지난해 아빠(홍아무개씨·44)는 구멍난 천장 곳곳을 실리콘으로 발랐다. 보일러를 틀면 방 안에 물방울이 맺힌다. 석면에서 맺힌 것이다.

 

집이라 임대주택도 못 받는다

결국 아빠는 컨테이너 유리창도 텄고, 밖으로 방 하나를 더 덧댔다. 슬레이트 지붕을 얹었다. 공기 좋은 방이 하나 생겼으나, 컨테이너 난방은 더 무기력해졌다.

영희네 역시 무허가 건물이다. 이웃이 빌린 공공부지를 나눠쓴다. 이웃에게 부지 사용료로 매해 100만원을 낸다. 산마루 골짜기에서 물을 끌어다 쓴다. 아껴써야 한다. 호스가 얼거나 열선이 고장나면 낭패다. 지난해에도 며칠 동안 물을 쓰지 못했다. 눈이 많이 오면 엄마 손을 잡고 학교까지 걸어간다. 양말과 신발 한 켤레를 더 챙겨 학교에서 갈아신는다.

영희는 말했다. “박스집이 싫어요. 난 왜 친구들도 집에 못 데리고 와?” 영희네는 강원주거복지센터의 도움으로 올해 영구임대주택을 신청했다. 떨어졌다. 변 사무국장은 “주거복지재단이 컨테이너를 집으로 간주한다더라”고 말했다. 고약한 모순이다. 집이 아니라 늘 퇴거당할 불안으로 사는데, 집이라서 퇴거할 수 없다.

갈수록 내성적이 되던 영희는 지난해 보습학원을 다니면서 조금씩 나아진다. 학원비가 한 달 30만원이다. 가족은 개를 팔아 올여름 500만원이 안 되는 돈을 벌었다. 11월 통장엔 딱 120만원이 남아 있다. 영희 엄마는 “올겨울엔 (돈을) 빌려서 살고, 내년 여름에 벌어서 갚고 해야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도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니다.

보고서는 “(파악한) 컨테이너 거주자 등 경우, (기초생활) 비수급자 전원이 최저생계비 이하로 살고 있었다”고 말한다. 전체 비주택 거주자 가운데 최저생계비 이하 비수급자는 50.1%다. 표본은 적지만, 추세가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보고서는 “컨테이너 등 거주자 경우, 지역 서비스 정보에 대한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 거, 영희는 잘 모른다. 영희는 추위만 무섭다. 언젠가 아빠 친구들이 머무는 방에 종이를 붙였다. “이 방은 겨울에 추워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출입금지.”

 

가난의 종착역, 컨테이너
» 박순정씨의 발이 시꺼멓게 텄다. 바로 옆 개울가에서 떠온 물을 끓이지도 않은 채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 박순정씨의 발이 시꺼멓게 텄다. 바로 옆 개울가에서 떠온 물을 끓이지도 않은 채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컨테이너 난민 중엔 체념형 빈민이 많다. 노숙에 버금간다. 때론 노숙도 택할 수 없어 찾는 종착지다. 10년가량 컨테이너에서 생활하고 있는 지아무개(79)씨는 “이제 안 아프게만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씨는 취재진이 만난 컨테이너 난민 가운데 사회적 돌봄을 가장 잘 받았다. 기초생활수급자(32만원)에 노령연금(7만2천원)을 받는다. 국가보훈처가 한국전쟁 참전유공자 수당(9만원)도 주고, 시도 참전용사 위로비(2만원)를 준다. 마을 안에 거주하는 덕에 봉사단체의 도움도 적이 받는다.

앨범 속 지씨의 과거는 가난과 거리가 멀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연대장이던 시절 운전병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나주비료, 남해화학에서 일했다. 1970년대 중반, 서울 한남동에 320만원짜리 단독주택을 갖고 있었다. 아내가 부동산 투기로 재산을 날리기 전까지다. 빈손으로 혼자 친형이 있는 원주로 내려온 게 1980년대 말이다. 중앙고속도로 건설 당시 경비(1995~2000년)로 일한 게 마지막 돈벌이였다. 당시 건설사 과장이 소개해준 임시 주거용 컨테이너가 지씨의 유일한 거처가 됐고, 삶의 마지막 거처가 될 듯싶다.

다른 이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두 가지 특징이 이유가 될 수 있다. 보고서를 보면, 컨테이너 등의 거주자는 비주택 거주민 가운데 평균소득이 최저이면서 연령은 최고였다. 월평균 소득 34만4천원은 전체 평균 59만원의 6할이 안 된다. 반면 평균연령은 64.8살. 전체 평균(52.1살)보다 13살가량 높다.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 주변의 무관심과 모멸은 컨테이너의 고립을 부르고, 컨테이너의 고립은 주변의 무관심을 강화한다. 지씨는 “마을 청년들이 정말 예의 없다”며 “제대로 인사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원주 토박이 허아무개(65)씨도 ○○마을 내 유일한 컨테이너 거주자다. 그 마을의 유일한 초가집이 7년 전 기울었다. 남편은 개·보수 할 돈이 없어 컨테이너를 들여놨다. 2008년 컨테이너에서 남편을 저세상으로 보냈다. 무엇이 가장 서러운지 물었다. “애들이 지네 키운 거, 나 좀 저거 한 거 알아주지 않을 때 서운하다 그러죠.” 허씨는 울었다. 두 딸과 두 아들도 형편이 여의치 못한 듯하다. 허씨는 장애인 아들(막내)에게 용돈을 달라고 한다. 아들은 장애수당을 쪼개준다. “우리가 이 동네에서 제일 가난하지요.” 노파를 피한 시선이 점심 때 해먹었다는 부르튼 떡볶이에 닿았다. 허씨는 올해 비로소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원주엔 현재 공가(빈집)가 1만3천 가구에 이른다. 미분양 1800가구, 임대아파트 1500가구 등이 포함된다. 급히 보호가 필요한 비주택 거주민은 1200여 명이다. 집이 있는데, 집이 없다. 주거 빈민에게 이보다 잔인한 진실은 없다. 원주만의 이야기인가.

대한민국은 2010년 센서스(인구주택총조사)를 진행 중이다. “대한민국이 당신을 빼놓지 않도록!”이라고 연일 신문과 방송을 통해 말한다. 그들의 시선이 비주택 거주민에게 얼마나 가닿을지 알 수 없다.

보고서 실무를 책임진 한국도시문제연구소 서종균 연구원은 “센서스에 비주택 거주민에 대한 조사까지 포함하는 건 비효율적이라 보았는데, 유럽에서 홈리스 관련 조사를 포함한 걸 알고 부끄럽단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집은 남아도는데 살 집이 없다

지난 7월14일 서울 왕십리 뉴타운 철거 예정 빈집에서 7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주검이 발견된다. 뼈만 남았고 텔레비전 케이블이 목에 감겨 있었다. 경찰은 죽은 지 두 달 정도 된 것으로 추정했다. 비주택 난민의 잔혹한 각본이다.

변상훈 사무국장은 “반노숙 상태인데, 노숙자보다도 관리나 보호가 되지 않는 게 바로 컨테이너 거주자”라고 말한다. 취재진이 만난 이들 가운데, 실제 저마다의 ‘119’를 이웃에 실시간으로 전할 이는 많지 않아 보였다.

서 연구원은 “센서스에서 빠진 이들이야말로 정책 고민의 대상”이라며 “모든 국민의 기본적 상태를 기록하는 게 국민의 기본권·인권 차원에 부합되고, 센서스에서 빠지기 쉬운 집단들을 어떻게 최소화할지 고민하는 게 국가 인권사회의 척도”라고 말했다.

강승준씨는 “무엇보다 힘든 건 외로움”이라고 말했다. 눈이 오면 사람 구경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한참 군대 얘기를 했다. 제대를 앞두고 간첩 김신조가 침입해 복무 기간이 2개월 늘었다. 말년에 양발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녔다. “그래도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 컨테이너 난민은 배가 차면 춥고 몸을 녹이면 외롭다. 치악산 너머 겨울이 달려오고 있었다.원주=글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컨테이너 난민’을 위한 주거 대책
체념을 어루만지는 정부와 이웃의 손길부터

컨테이너. 건축법 시행령을 보면, 가설건축물로 때로 임시숙소로 사용된다고 정의된다. 존치 기간은 최대 3년이다. 단, 전기·수도·가스 등의 새 설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 돼 있다. 취재진이 만난 컨테이너는 별도의 허가를 받지 않은 한 모두 불법인 셈이다.
주거 빈민이 컨테이너를 마지막 종착지로 삼고 있다는 추정은 근거가 있다. 보고서를 보면, 이주 의향을 묻는 질문에 컨테이너 등 거주자가 압도적으로 부정적이었다. 40%가 “옮길 뜻이 없다”고 말했다. 비주택 거주민 전체 평균은 28%에 불과했다.
정부에 바라는 주거 지원책을 묻자, 10명 가운데 3.3명이 현재 살고 있는 곳의 주거 환경만 개선해달라고 했다. 비주택 거주민 평균은 11%다. 공공임대주택 제공이라고 답한 이들은 40%로 유형별 최저였다. 여건이 좋다는 뜻이 아니다. 보고서는 주거환경 만족도도 물었다. 컨테이너 등의 거주자는 사회복지시설·의료시설·문화시설·일자리 접근성 등 모두 최저점(5점 만점에 2점 전후)을 줬다.
포기하고 체념한 주거 빈민이란 얘기다. 이 지점에서 정부 지원 등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보고서는 △단기적으로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여러 설비를 제공하고 △장기적으로는 적절한 거처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임대주택의 제공 △현 거처의 개선 등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역사회의 협력도, 고립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수적이다. 수급비는 말 그대로 생활비라는 점도 별도의 주거 대책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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