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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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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만나기

등록 2010-09-09 17:23 수정 2020-05-03 04:26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올여름 국제어를 배울 계획을 꼭 실천하기로 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지고 순발력이 모자라므로 일상에 작은 일정을 하나 끼워넣는 변화만 생겨도 온통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가 많다. 국제어를 배우기 위해 일주일에 한두 번 시내를 오가는 것이 두 달이 돼가는데, 아직 길도 제대로 익히지 못해 헤매기 일쑤다. 매번 숨차게 오가다가 겨우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올 즈음 옆자리의 어린 친구가 물었다. “몇 학번이세요?”

차별의 시작, 나이·학번·학교

오랜만에 듣는 질문이지만 아주 익숙한 질문이기도 하다. 처음 만나는 상대에게 말을 걸 때 가장 먼저 건네는 말 몇 가지가 있지 않은가. 아마 소개하는 이름은 건성으로 들어도 더 새겨듣거나 묻는 질문들이 나이, 학번, 학교 등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가까워지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그중 제일 좋은 것이 공통점이나 동질감을 찾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이나 학번, 출신학교 따위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한 기본적인 정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이를 알면 재빠르게 상하 위계가 결정돼서 편할지도 모른다. 학교를 알면 더 편리하다. 출신대학이나 재학 중인 대학을 아는 것만으로 초면의 상대가 고등학교 때 어느 정도 성적이었는지까지 가늠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살고 있는 곳을 알면 생활수준이나 형편까지 예측할 수 있으니 나이, 학교, 사는 곳을 알면 초면에 알 건 다 아는 것일 수도 있다. 단박에 나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물론이고 위계 정도까지 추려지니 그 효율이 대단하다. 그 정도의 상대방 정보에서 출신학교가 같다거나, 하다못해 같은 지역에서 학교를 다녔다거나, 비슷한 학과라는 것을 찾게 되면 곧바로 ‘친근 모드’로 진입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적잖은 나이인데도 나는 그런 질문이 그다지 편하지도 친근하지도 않다. 상대방의 다른 면을 전혀 모르는 채 나이로 관계의 상하 위계를 규정하려는 방식이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이로 위계를 정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초면에 나이를 아는 것은 사실 아무런 쓸모가 없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조금 더 예를 갖추고 나보다 어리면 느긋해지는 자세를 갖게 되기 쉽다. 이제 막 만난 사람이라면 더 그렇지 않겠는가. 접촉 사고가 나거나 공공장소에서 다툼이 일었을 때, 나이가 많은 쪽이 잘못을 시인해야 하거나 말이 막히면 최후의 수단으로 곧잘 동원하는 큰소리가 ‘너 몇 살이야?’인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학번도 그렇다.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대학을 진학한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훨씬 많다. 그럼에도 ‘386’이라는, 학번으로 만들어진 용어가 세대를 대표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학번 문화’를 가장 폭넓게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노동자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몇 학번인지를 말하는 일도 다반사였고, 하물며 그네들에게 ‘학번 없는 노동자’라는 말을 붙일 만큼 그 세대의 식자층은 무감하다. 위장취업이나 노동운동을 했던 학생운동 출신들에게 ‘학번 있는 노동자’라고 한다면 모를까 노동자에게 학번 여부를 운운할 만큼 무신경하기에 생겨난 일일 것이다.

알아가면서 천천히 이해하기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고 사는 형편도 나아졌다고들 하지만,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똑같은 질문 몇 개로 재단하거나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학번이나 학교를 묻는 것은 상대를 빠르게 파악하고 친근해지는 효율이 아니라, 자칫 그 사람이 가진 소외와 자격지심을 건드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질문들은 처음이 아니라 차차 알아가는 과정에서 나누어도 충분하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몇 살이세요?’ ‘몇 학번인가요?’ ‘어디 사세요?’ 따위를 묻지 않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더욱 폭넓게 이해하고 나를 보여주는 시작이 될 수 있다.

신수원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신수원씨는 이번호를 끝으로 ‘노 땡큐!’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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