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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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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폐기장, 영광이 뜨겁다

등록 2001-06-21 00:00 수정 2020-05-03 04:21

유치위에서 지역민 유치동의서 받아 청원서 제출… 군민대책위는 조작이라며 반발

전남 영광군 방사성폐기물관리시설유치위원회(이하 유치위)가 유치대상지역 가운데 최초로 방사성폐기물처분장 유치청원서를 제출해 지역사회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유치위는 지난 6월11일 지역민 2만5455명의 유치동의서를 받아 영광군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2만5455명이라는 숫자는 영광군 전체 유권자의 50%를 넘는 것이다. 일부 언론은 이런 사실에 대해 “영광군 주민들의 용단”이라며 한껏 추어올렸다. 그러나 정작 영광 지역민들 사이에서는 서명자가 조작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큰 파문이 일고 있다.

중복서명, 대리서명 논란

지난 13일 핵폐기장 반대 영광군민대책위원회(이하 군민대책위)는 유치위쪽이 영광군에 낸 유치동의서 서명자 명단을 검토한 결과, 11개 읍·면 대부분 지역에서 수십∼수백명씩이 동일 필체로 서명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한 마을에서는 주민 100여명의 서명 필체가 모두 같았고, 또다른 마을에서는 이장 필체로 수십장이 서명됐다고 덧붙였다.

뿐만 아니라 어떤 서명용지에는 영광군에 산 적도 없고 살고 있지도 않은 인물들의 이름이 한두명도 아닌 수십명씩 서명돼 있었고, 이들의 주민등록번호조차 조합이 맞지 않는 등 조작의 흔적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고 폭로했다. 군민대책위는 “대리서명을 넘어서서 대한민국에 실존하지도 않는 ‘유령인물’들이 서명자 명단 곳곳에 단체로 올라와 있음이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유치위의 김영득(70) 위원장은 “지난 12월부터 6개월 동안 가정방문을 통해 서명을 받았다”며 “중복서명자가 한두명 있을 수 있지만 절대 조작된 서명서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대필에 대해서도 김 위원장은 “시골이라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대신 써줄 수 있지 않느냐”며 “2만5천여명 모두 핵폐기물 관리시설 유치를 동의해 서명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 중 몇명 정도는 영광 주민이 아닌 사람도 있을 수 있으나 청원서를 제출하기 전에 정지작업을 통해 278명은 걸러낸 상태이기 때문에 서명 조작의혹은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민대책위 정용안(36) 집행위원장은 “친필서명조차 핵폐기장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전기료를 감면해달라’는 서명을 한국전력 검침원들과 함께 다니며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청원서에 대한 진위가 분명히 가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민대책위 김용국(40) 대외협력부장도 “폐기물시설 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주)쪽이 유치위원들에게 활동비를 지급하고 서명과정에 개입했다”며 “규탄대회를 열고 신청철회투쟁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군민대책위는 지난 4월 영광군농민회·전교조·청년회의소 등 영광군의 72개 사회단체로 구성돼, 영광핵추방운동협의회와 함께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번 청원서명이 지역사회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청원서가 갖는 여러 가지 파장 때문이다. 폐기물 처리장 유치신청은 주민들이 청원을 하면 자치단체장이 지방의회의 동의를 얻어 산업자원부에 신청하도록 돼 있다. 즉 유치위가 영광군 군수에게 낸 청원서를 군수가 적극 수용할 경우 군수 이름으로 의회동의서를 받는 절차를 밟게 된다.

이에 대해 군민대책위는 “유치신청을 하는 지자체가 없을 경우 6월 말 공모마감 뒤 한국수력원자력(주)가 국가정책 사업 지정고시를 하게 되기 때문에 허위로 작성된 서명부라도 핵폐기장 유치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점을 유치위가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유치위 김영득 위원장은 “이미 영광에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마당에 언제까지 방사성폐기물을 임시보관소에 방치할 것이 아니라 선진국들처럼 방사성폐기물을 영구보관할 처분장을 하루빨리 건설하여 안전하고 깨끗하게 관리해 나가는 것이 현명하다”며 “게다가 2천억∼3천억원의 지원금으로 지역경제가 활성화된다면 영광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유치청원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청원서 낸 곳마다 문제 생겨

유치위 김용석(영광군의회 의원)씨도 “이번 청원서는 프랑스와 영국 등 선진국의 핵폐기장을 견학한 뒤 핵폐기장의 안정성과 현대과학에 대한 신뢰 속에서 내려진 결정”이라며 “현 영광군수는 영광원전 5·6호기 건설을 본인 스스로 허가낸 사람이므로 그보다 안전한 처리장 시설 허가를 거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고 영광군의 결단을 촉구했다. 유치위는 만약 영광군이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논의 뒤 대책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유치위는 지난 2월에도 103명의 연서로 유치청원서를 군의회에 제출했지만 ‘소수의견’이라는 이유로 군의회에서 심의 자체를 기각한 바 있다. 유치위는 지난 2월 발족하여 현재 지역건설업자 등 소상공인들을 중심으로 40여명의 위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군민대책위는 핵폐기장 유치에 따른 수천억원의 지원금과 건설경기 활성화, 유동인구 증가 등의 직간접적인 수혜자가 누가 될 것인가를 차분히 따져보라고 주문한다.

현재 영광군 외에 전남의 강진군, 진도군과 전북 고창군, 경남 하동군에서도 방사성폐기물관리시설유치위원회가 설치돼 있다. 영광군에 이어 전북 고창군이 14일, 전남 진도군과 강진군 유치위원회가 15일 주민들의 서명을 받은 유치청원서를 각각 해당 지방자치단체에 제출한 상태다. 이로써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유치청원을 낸 지역은 모두 4곳으로 늘어났다.

강진·진도군의 경우 반대운동이 거세자 군의회에 상정을 보류한 상태며, 고창군 ‘핵폐기장 반대를 위한 군민대책위원회'도 “위험시설을 곁에 둘 수 없다”며 강력 반발하고 있어 주춤하고 있는 상태다. 이들은 “정부가 핵연료 처분에 대한 불안전성은 숨긴 채 개발논리를 앞세워 군민들을 현혹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광군도 허위서명 의혹이 제기되자 공식입장을 보류해놓고 있다. 영광군 원전관리계 관계자는 “다수 군민의 의사를 존중하여 처리하겠다”며 “이번 일로 군민간의 갈등이 커질까 걱정이다”는 공식적인 입장만 밝혔다.

지난 2∼4월 주민들이 유치청원서를 냈던 충남 당진·보령·태안 등 3개 시·군의 경우 지자체가 “주민 대다수의 의견이 아니다”라며 반려한 적이 있어, 이번에도 지자체의 처리결과가 주목된다.

방사성 폐기물 처리시설문제는 1986년 한국원자력연구소가 부지 선정작업에 착수한 이래 지금까지 10여년을 끌어왔다. 90년 안면도를 후보지로 선정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이듬해 선정안을 철회했으며, 95년엔 굴업도를 시설지구로 지정고시했다가 지질조사 결과 활성단층이 확인돼 백지화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급기야 산업자원부는 지난해 6월부터 전국 46개 임해지역 기초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유치공모에 들어가 지난 2월 접수를 마감했으나 한곳도 신청하지 않아 공모시한을 4개월 연장했다.

너무 오래 끌어온 폐기물 처리시설

1조원의 예산을 들여 60여만평에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시설’(2008년 완공)과 ‘사용후 연료 중간저장시설’(2016년 완공) 등을 건립할 예정인 산업자원부는 유치신청을 하는 지자체가 없을 경우 한국수력원자력쪽이 다음달부터 지자체와 직접 협의를 벌인다는 방침을 정해놓고 있다.

영광핵추방운동협의회 하선종(33) 사무국장은 “스웨덴은 국민투표를 통해 핵산업 중단을 결의한 상태인데 우리나라는 안전성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없이 병원의 방사성물질, 연구용 원자력, 발전소 해체 폐기물, 사용 뒤 핵연료까지 모든 핵쓰레기를 영광에 유치하려 하고 있다”며 “100%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역에 폐기장 유치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광주=글 정금자 엔터닷컴 기자
사진 형민우 엔터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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