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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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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조리 만들어 복을 팝니다”

등록 2001-01-18 00:00 수정 2020-05-03 04:21

전남 화순군 북면 송단리 ‘복조리 마을’ 사람들의 설맞이 풍경

복을 파는 마을이 있다. 전남 화순군 북면 송단1구 송단마을. 해마다 복조리를 만들어 전국 각지에 ‘복’을 보내는 마을이다. “마을 어르신들은 위 어르신들에게, 그 어르신들은 또 그위 어르신들에게서 배웠다”고 하니 족히 100년은 넘는 역사다.

칠순 조업순 할머니부터 열일곱 미영이까지, 마을사람 대부분이 수십년의 경력자들이다. 이들의 분주한 손길로 송단마을 설맞이는 다른 곳보다 일찍 시작된다.

겨울이 되면 29세대가 복조리 가공업체로

송단마을은 빛과 음향이 있는 마을이다. 백아산 기슭의 산간마을에 들어서자 푸른 대숲과 온 동네 짐승들이 취재진을 반겼다. 염소, 고양이, 개, 소, 암탉까지 ‘컹컹, 매애, 음모 음모∼.’ 짐승들의 ‘사운드 오브 뮤직’에 끌려 주민들이 모여 있는 복조리공동작업장(마을회관)을 쉽게 찾았다.

“추수 끝내고부터 설 전까지 집집마다 정신없어. 조리 맨드니라고. 내가 시집왔을 때도 어른들이 만들고 있었응께, 적어도 100년은 됐지라.”

경력 50년을 자랑하는 이점순(74) 할머니. 20∼30년 전 ‘잘 나갈 때’에는 밤새 아이들까지 만들어도 주문량을 대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복조리 덕에 아이들 공책도 사고 학교도 보냈으니 말 그대로 이 마을의 ‘복덩이’인 셈이다. 마을 이장 오종원씨의 부인 이해정(34)씨는 “조리를 찾는 이들이 줄었지만 올해도 꽤 만들었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세상이 변했지만 설날 복조리를 거는 습속 덕에 겨울철마다 송단마을 29세대는 여전히 ‘복조리 가공업체’가 된다는 것이다.

송단마을이 지금껏 복조리 마을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마을사람들의 부지런함과 백아산의 산죽 덕분이다. 이 마을사람들은 산속 깊은 곳에서만 나는 “조릿대를 찌러” 음력 7∼8월 백아산에 오른다. 가시덤불 속에서 자라는 산죽을 찌다보면 얼굴 긁히고 옷이 찢기기 일쑤여서 “반란군 복장을 하고 가야” 한다.’ 잎과 뿌리를 쳐낸 1년산 조릿대를 응달에 저장했다가 추수가 끝난 11월부터 대보름까지 작업을 하는데 그 과정 또한 만만찮다.

연필 굵기의 산죽을 4결로 쪼개 마을 개울에 반나절쯤 담근 뒤 이것을 다시 하루 정도 말린다. 물을 머금어 부드러워진 대오리를 씨실 날실로 엮어 조리를 만든다. 산죽 속대를 쪼개 만들기 때문에 일반 대나무 껍질로 만든 수입산과는 그 질을 비교할 수 없다. “우리 복은 우리나라 복조리로 들어온다”는 조순임(60)씨. 그는 하루에 한질(50개)에서 2질을 만들어낸다. 1시간에 대여섯개를 만드니 하루 12시간 이상 작업을 해야 가능한 양이다. 마을 전체 한해 생산량은 10만개쯤. 백화점, 담양 죽물시장, 농협이나 단체에서 주문받아 팔고 있다. 1개에 500원, 한쌍에 1천원이니 들인 공력에 비하면 싼값이다.

백아산 산죽이라야 우리 복이 들어온다

지난 99년에는 일본 유학생들이 인터넷을 통해 조리 2만개를 주문했는가 하면, 전주박물관에서 주최하는 민속학교 학부모와 아이들 100여명이 견학을 와 가마솥 밥을 해대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전통이 살아 숨쉬는 마을’로 추천되기도 했다.

쌀을 일 듯 복을 일어준다는 복조리. 옛 사람들은 섣달그믐 자정부터 정월 초하루 아침 사이에 1년 내 쓸 조리를 사서 걸어놓았다. 일찍 살수록 좋다고 믿어 설날 아침에 사지 못한 이들은 새해 첫 장날 조리를 샀다. 돈이나 실 등을 넣은 조리 한쌍을 방문 위나 대청에 걸어두고, 1년 내내 복을 받고 재물이 불어나길 바란 것이다.

암울한 상황은 걸러지고 복만 일도록, 신사년 새해에는 집안에 복조리 한쌍을 걸어보자.

화순=글·정금자/ 프로덕션 엔터닷컴 기자
사진·형민우/ 프로덕션 엔터닷컴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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