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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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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난 불교 정신을 보듬다

등록 2001-04-04 00:00 수정 2020-05-03 04:21

<font size="4" color="#a00000"> 송광사 목조삼존불감을 복원한 고준영 교수… 현해탄 넘어 돌아온 한국에서 문화재를 지키며 살겠다</font>

목조예술의 정수 송광사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이 최근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되기까지는 수십년이 걸렸다. 국보를 복원해줄 손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보수를 포기한 채 방치되었던 목조삼존불감은 지난해 5월 일본 시가현 온조지(園城寺) 불교존상수복원(佛敎尊像修復院) 고준영(82·다카하시 도시오) 교수의 손길을 만나면서 최근에야 본래의 성스러움을 되찾았다.

누구도 손 못대던 불상을 치료

그래서인지 고 교수를 모신 송광사(전남 순천시 송광면)의 봄날은 분주했다. 전남 목포시가 고향인 고 교수는 24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문화재 복원술을 연구, 전통적인 기법으로 불상을 보수 복원하는 일본 최고의 문화재 복원 전문가다. 최근 그의 한국 방문으로 송광사 응진당 나한상들과 조계산 너머 선암사의 불상, 멀리 해남 대둔사의 동자상들까지 보수 복원되는 은혜를 입었다. 명의가 나타나자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몰려드는 격이다.

더군다나 3월부터 송광사에 불교성보보수교습원(佛敎聖寶補修敎習院)을 개설, 그가 후학을 양성하고 있어 송광사에는 봄의 활기가 가득했다.

송광사 성보박물관장 고경(古鏡) 스님은 “우리나라에서는 목조삼존불상을 복원할 사람이 없어 아예 손을 못 대고 있는 실정이었다”며 “살아 있는 보물 같은 분”이라고 고준영 교수를 소개했다.

고 교수는 송광사의 부탁으로 지난해 5월부터 올 3월까지 세 차례 한국에 들러 삼존불상을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본존석가여래상이 조각돼 있는 중앙 윗부분의 나무가 떨어져 나가 다른 나무로 덧댄 것을 같은 재질의 백당나무로 복원하고 칠을 한 것이다. 또 경첩의 끊긴 연결쇠도 X선 촬영을 통해 동으로 복원했다.

중국 당나라 시대(8∼9세기)의 것으로 추정된 목조삼존불상은 보조국사 지눌이 중국 금나라 황후의 병을 치료해 선물로 받아 몸에 지니고 다녔던 원불로 전해지고 있다. 하나의 나무를 삼등분하여 높이 13.9cm, 폭 7cm의 포탄형으로 만든 것이어서 어디서든지 펼치면 이동식 법당이 되는 귀한 물건이다. 뒷부분까지 섬세하게 특수조각돼 문화재로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작품. 이런 작품을 치료했으니 송광사로서는 숙원사업을 해결한 셈이다.

“저는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불교정신에 가깝습니다.”

일본에서 문화재 전문의로 거듭나다

마치 생명을 다루듯 불상을 들여다보는 고 교수에게 “불교신자냐”고 물었더니 불교의 자애와 배려, 평등정신을 깊이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복원작업을 할 때 그 정신이 후세에 전해지고, 또 사람들이 문화재를 보며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 그런 정신이 살아 있어서인지 60년 가까이 일본 땅에 살았음에도 한국말이 서툴지 않다. 고 교수는 조금 느리긴 하지만 또박또박, 그의 일본행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제시대 목포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5살에 상경, 명동의 어느 백화점과 일본타이프라이트 주식회사에서 22살까지 일하다 일본인 하숙집 주인아들과 만주로 향하게 된다. 보통학교 시절 일본인 동무들이 많았던 고 교수는 만주에서 일제의 행각에 크게 실망, 일본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며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향했다. 1945년 11월의 일이다. 1달러가 360엔이던 시절, 그는 그곳에서 그림 1장에 1달러씩을 받고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꾸렸다. 그러나 일본에서 만난 일본인들도 만주의 일본인들과 비슷했다. ‘내가 왜 일본 땅에 와서 미군들 그림을 그려야 하나’ 하는 회의도 밀려와 1946년 7월 그는 다시 한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우리나라에 와서 보니까 경찰들이 곤봉으로 데모하는 학생들의 머리를 때려 피가 터지는 폭력이 많았어요. 여간 화가 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공부해야겠다며 일본으로 다시 떠났습니다.”

1946년 12월 일본으로 간 고 교수는 가마쿠라라는 미 해군기지 근처에서 미군 그림을 그리며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도쿄예술대학을 마치고 도쿄국립박물관 내 미술원국보수리소에 근무중 일본 불상을 조사하고 싶어 일본 전토를 4년간 돌아다니기도 했다. 도쿄예술대학 서전교수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여행중 관찰한 불상에 대해 스케치하고 여러 가지 자료를 모았다.

그러다 여권 재발급 기간을 놓쳐 출입국 관리국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출입국관리국으로 부랴부랴 달려온 서전교수는 미술원을 그만두겠다는 고 교수를 설득, ‘당신은 일본 속의 한국인’이라며 괘념치 말라고 위로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지금도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있고 국적이 다르면 불편한 점이 많으니 귀화할 것을 권한다. 3년마다 여권을 재발급하는 불편도 덜 수 있다는 것이다. 42년께의 일이다. 그래서 그는 일본인 다카하시 도시오가 된다.

여권사건이 있은 뒤에도 고 교수는 미술원국보수리소에서 계속 일을 해 27년이라는 경력을 갖게 됐다. 일본 문화재 복원 대역사로 알려진 교토의 33칸당 천수관음보살 보수공사도 74년부터 12년 동안 진행, 그의 손으로 1천불 중 500여불을 복원시켰다. 지금까지 총 1500여점의 일본 불상이 그의 손길에 의해 부활된 것이다. 깨진 불상을 그러모아 붙일 때는 내과의가 되고, 부러진 손가락을 이을 땐 정형외과의가 되며, 손상된 얼굴에 색을 입힐 땐 피부과 의사가 되는 ‘문화재 전문의’인 셈이다.

그런 그가 한국의 문화재 복원과 관리에 대해서는 할말이 많다. 어깨가 깨진 채 방치되고 있는 서산 마애삼존불, 이끼류가 끼여 시커멓게 변해버린 부도, 머리가 벗겨져 있는 불상 등이 그렇다. 모든 문화재는 원래 만들어진 그 모습으로 복원해 보존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 지켜지지 않는 한국의 문화재 정책이 안타깝기만 하다.

마지막 여생은 후학과 함께

그래서 그는 최근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마지막 여생을 조국의 후학들을 가르치는 데 바치기로 한 것이다. 힘들겠지만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송광사 불교성보보수교습원에서 한국의 후학들을 가르칠 생각이다. 지난 3월부터 부산, 서울 등지에서 온 6명의 학생들이 송광사에서 묵으며 무료로 고 교수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 동국대 대학원에 재학중인 한 교습생은 대학원 수업이 있는 날은 순천과 서울을 오가며 배움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스승이 “사실적 묘사와 나라의 문화재를 소중히 여기는 애국정신을 가장 강조한다”며 “꼭 스승이 바라는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은 먼저 3개월 동안 데생과 백묘(선 위주의 정밀묘사)를 연습 한 뒤 1년간은 흙으로 소조상을 빚고 또 1년은 나무로 직접 조각을 하는 수업을 하게 된다. 이렇게 3년 동안 기초를 배운 뒤 비로소 본격적인 불상 복원수업에 들어간다. 고 교수는 “우리의 전수자를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며 “조국 문화를 우리 손으로 보수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고 교수가 박물관·정부기관 등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을 마다하고 송광사를 선택한 데는 무엇보다 송광사쪽의 우리 문화재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이다. 방장 스님을 비롯한 주지 스님이 우리 문화재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는 것.

고 교수는 “나라에서 본격적으로 해야 할 일을 절에서 하고 있다”며 “일본은 국보급 회화 복원 전문가만도 60여명이 활동중이다”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국보급이 아닌 지방문화재 등을 복원하는 전문가들은 훨씬 많다는 것이다.

문화재보수자격증만을 중시하는 우리의 문화재 정책을 두고 “운전면허만 따두고 운전은 전혀 못하는 사람을 양산하는 것과 같다”는 그의 지적은 매섭다.

송광사=글 정금자/ 엔터닷컴 기자
사진 형민우/ 엔터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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