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놀이꾼 류석, 천국을 무대로…

등록 2000-12-06 00:00 수정 2020-05-03 04:21

한 광주지역 문화운동가의 쓸쓸한 최후… 고교생 투사·풍류남아로 살았던 너무나 짧은 생애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깊게 깔린 슬픔으로 어수선하다. 자기들의 설움이 겹쳐 더욱 무겁다. 그렇게 무거운 상가는 생전 처음 본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야 말 것만 같았다.”

광고

문화운동가 류석(38)씨의 빈소에 다녀 온 어느 지인이 인터넷매체 ‘디지털광주21’에 남긴 글은 비장했다. 가난하지만 20여년 운동가의 길을 놓지 않았던 류석씨의 부음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하늘이 내린 놀이꾼’의 웃음 뒤에는, 그의 쓸쓸한 삶이 숨어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하산길에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숨져

광고

홍기선 감독과 영화 를 공동 기획하고 출연했던 류씨는 지난 11월26일 지인들과 전남 화순 모후산을 답사하던 중 하산길에 심장마비로 생을 마쳤다. 평소에 ‘가슴이 답답하다’면서도 병원 한번 가지 못했던 터라 심장마비라는 사인은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고인의 호주머니에서는 1천원짜리 한장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먹고사는 일보다 뜻있는 일에 열정이 강했어요. 말없이 혼자 감당하는 성격이라 싫은 소리 못하고 거절 못하고 항상 바빠…. 저도 모르게 가슴에 병이 자랐나봐요.” 부인 김천순(38)씨는 두딸 화(8)와 소이(5)가 아빠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류씨의 남다른 삶은 5·18광주민중항쟁 때 시민군이 되면서부터 시작됐다. 고등학교 2학년의 나이에 총을 들고 독재와 맞섰다. 마지막 항쟁의 밤, 시민군 지휘부는 고등학생들에게 귀가를 권했으나 류씨는 도청을 사수하겠다며 끝까지 남아 5월27일 새벽 4시께 지금의 전남도의회 의장실 앞 초소에서 체포돼 수감되었다가 그해 여름 석방됐다. 그뒤 1982년 전남대 법대 행정학과에 입학해서는 국악반과 마당극회 활동을 했다.

“마당극은 80년대 유일하게 막지 못했던 최대의 정치 집회였지요. 석이는 무대를 기획하고 연출하면서도 자신은 정작 악역이나 조연만 맡아서 했어요. 그래도 얼마나 유명했는지….”

광고

류씨의 오랜 친구 김호균(38)씨는 그가 일본형사나 고문경찰 같은 악독한 연기를 소름이 돋을 만큼 잘 소화해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김영주 교수(44·초당대)도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재담, 배꼽 잡는 몸놀림, 관객을 후려잡는 카리스마’에 류씨를 딱 한번 보고 ‘반했다’며 그의 재능을 극찬했다.

고단한 나날에도 열정과 자연사랑 간직

풍류남아, 잡학사전, 정열의 청년으로 불리던 류씨는 조정래 원작 을 극화해 무대에 올렸는가 하면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 만들 땐 배우로 출연, 기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영화 학내 상영을 경찰들이 막자 이에 항의하는 투석전을 벌이다 헬기에서 날아온 직격탄에 얼굴을 맞아 오랜 투병생활을 하기도 했다.

류씨는 대학을 마친 뒤 몇 군데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이내 생계와 문화운동의 결합이 어렵다는 판단에서 출판사, 광주환경운동연합,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대동문화연구회 등에서 활동하며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과 자연사랑을 실천해왔다. 우리 문화와 자연에 대한 대여섯권 분량의 류씨 원고는 아직 책으로 엮이지 못하고 남아 있다. 가난과 빚에 쫓기면서도 그는 무엇인가를 향해 20년째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광주=글·사진 정금자/ 프리랜서그룹 엔터닷컴 실장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광고

4월3일부터 한겨레 로그인만 지원됩니다 기존에 작성하신 소셜 댓글 삭제 및 계정 관련 궁금한 점이 있다면, 라이브리로 연락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