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서울역의 풍경은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딱 자른 단면 그대로다. 먹고사는 일에 바쁜 대로, 느긋한 대로, 그저 그런대로 그 템포를 따라 사람들은 움직인다. 앞줄에서 경남 밀양행 KTX표를 사는 이의 말투도 그랬다.
밀양은 내 성씨의 고향이기도 하고, 화제가 된 영화의 배경이기도 하고,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풍경이 움직이는지 내가 움직이는지 모를 그 조심스러운 출발의 시간이 지나고, 옆자리에 앉아 있는 그를 보았다. 베이지색 점퍼 차림의 수더분한 중년 남자였다.
“밀양까지 가시나 보던데요?”
“거기서 진영으로 갈 겁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던 열관리 학원이나 웨딩뷔페 따위 간판이 사라지고 연녹색 산자락의 나무들과 파란 하늘을 품은 논들이 펼쳐졌다. 밀양을 거쳐 봉하로 가는 길이었다. 독한 농약·제초제 대신 오리로 농사를 짓는다는 그곳으로 가는 초행길이었다. 그의 행선지도 같았다.
“아, 그렇군요. 편집장이시라고요? 저는 그분을 처음으로 차세대 정치인으로 선정한 기사로 을 기억합니다.”
“대중이 선호하는 차세대 리더십 1위에 꼽혔지요. 1999년인가 그렇습니다. 2002년 대선이 열리기 3년 전이니까, 상당히 예언적이었다고나 할까요.”
의기양양해진 나는 지난해 서거 당시를 화제로 올렸다. 가슴 뭉클하던 기억들, 서울 덕수궁 담길을 따라 끝간데없이 서 있던 조문객들을 떠올리며, ‘국장’이 아니라 ‘민상’이라고 썼던 기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표정은 약간 서늘해졌다. 완만하던 지형이 어느새 울퉁불퉁한 산세로 바뀌고 있었다. 그 불규칙한 능선에 취해 나는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밀양은 그냥 평범한 시골이었다. 진영으로 가는 무궁화호를 갈아타려면 1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했지만, 시내를 둘러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와 나는 역전 광장을 어슬렁거렸다. 전도연이 나온 영화 의 촬영지임을 홍보하는 어색한 광고판이 몇 개가 서 있었다. 영화는 구원·용서·화해를 이야기하려 했다고 한다. 이 낯선 도시에서 구원을 찾는다면, 어설프게 지어진 광장 한켠 원두막에서 장난치고 있는 젊은 엄마와 통통한 꼬마 아이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루한 무궁화호 열차로 갈아탈 시간이 됐다. 좌석이 듬성듬성 비어 있는 열차에서 다시 나란히 앉은 그는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지난해 서거 전에 썼던 ‘굿바이 노무현’이란 표지이야기를 보고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그 기획 의도는… 말하자면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하나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그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진보의 지평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과거를 통째로 부정하는 게 아니라 미래의 실마리를 잡아보자는….”
“이해합니다. 그래도 좀 매정했다고 할까요? 개인적으로 그랬다는 겁니다.”
차창에 들이치는 햇살이 수평으로 기울면서 어느덧 산천은 먹빛을 입기 시작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대기 탓인지 더 그윽하게 번지는 먹빛이었다. 열차는 낙동강 줄기를 건너고 있었다. 어둑해진 창밖을 내다보며 다시 서거 당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수사받을 당시 그분의 심정을 우리가 다 헤아릴 수는 없겠지요.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라는 검찰의 이미지가 계속해서 어떤 환상을 심어주는 것 같아요. 그리고 검찰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더군요. 지금 대통령에게도 반기를 드는 분위기던데요.”
“그런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보다 우리가 훨씬 더 정열을 바쳐야 할 숙제들이 많잖습니까?”
하긴 그랬다. 한갓 권력의 시녀가 되어 보복이나 증오의 감정으로 과거의 그림자를 붙들고 호령하는 게 검찰의 완력이라면, 그건 역사에 한 줌의 거름도 되지 못한다. 그와 비견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원대한 이야깃거리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이 남겨져 있지 않은가.
“그분의 유작은 읽어보셨는지요?”
“네,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만….”
“어떻습디까?”
“퇴임 뒤 진보가 갈 길에 대해 많은 고심을 한 진정성이 전해지더군요. 무엇보다 진보·보수의 문제와 국가의 역할에 대해 필생의 저술을 구상하면서 ‘먹고사는 문제’와 ‘우리 아이들’을 출발점으로 삼은 게 와닿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미래 세대에게 불안과 고통이 없는 사회를 빚어낼 것인가, 승자만 살아남는 경쟁이 아니라 상생하는 경쟁을 통해 사회 전체가 앞으로 나아가는 세상을 오게 할 것인가, 그런 진심 어린 고민을 하는 정치인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게… 그 과거형이 뼈아픈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도 낮게 탄식했다. 열차는 진영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마중 나온 이들의 차에 그와 함께 올랐다. 봉하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뒷산 자락을 타고 정토원까지 이어진 연등 불빛이 횃불 행렬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마을을 지나쳐 거친 비포장도로를 내처 달렸다. 길가에 흐르는 개천에 수풀이 무성했다. 농촌의 밤풍경이 주는 아늑함에 이곳이 서거 1주기를 앞둔 봉하마을이라는 긴장감이 섞여들었다. 여름이면 늦반딧불이가 황홀하다고 했다. 논에 농약을 치지 않은 지 1년 만에 그렇게 살아났다고 했다. 매일 어스름 녘 이 길을 산책하다 보면 세상의 이치를 슬쩍 알려주는 자연의 귀띔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화포 메기탕집에서 말갛게 끓인 메기탕을 먹으며 소주와 맥주를 섞어 몇 순배씩 돌렸다. 줄곧 생각에 잠겨 있던 그도 맛있게 술잔을 비웠다. 매운탕과 달리 메기탕은 다른 지방 사람에겐 익숙지 않은 맛이었는데, 그는 평소 즐겨왔던 것처럼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숙소에 들어 서거 뒤 출간된 책 한 권을 들췄다. “우리는 역사가 돈의 편이 아니라 사람의 편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채 쌓아올리지 못한 사상의 자재들이 가득히 널려 있었다. 오래도록 그와 함께 이런 생각들을 서로 나누고 다듬어 완성했다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날 잔뜩 찌푸렸던 날씨와 달리 이튿날은 점퍼를 벗어야 할 정도로 더웠다. 부엉이바위를 향했다. 비극의 무게처럼 육중한 바위였지만, 오르는 길은 우리의 기억보다는 짧았다. 편편한 바위 정상에 서자 봉화마을의 평화가 한 눈에 들어왔다.
“저 뱀산하고 저 개구리산, 정말 닮았네요?”
낮게 웅크린 야산의 모습이 하도 개구져서 그렇게 물었다. 내내 따라오던 그는 보이지 않았다. 정토원 쪽으로 방향을 돌렸나, 생각했다. 간밤에 본 화려한 횃불의 행렬을 쫓아 그리 발길을 서둘렀는지도 모를 일이다.
홀로 부엉이바위에 서서 찬란한 오월의 아침 햇살을 받고 있자니, 그날 아침 이 자리에 섰을 때 그의 마음은 어땠는지 묻고 싶어졌다. 저 아래 집을 내려다보며 남편으로서, 아비로서, 한 사내로서 어떤 흔들림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저 벌판처럼 내달리던 미래의 꿈이 어떻게 발길을 잡았는지 알고 싶어졌다. 처음으로, 간절히, 그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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