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다가오는 설날 고향을 찾아갈 기대에 부풀어 있을 수도 있고, 이미 고향집에 당도했을 수도 있겠다. 막 출발한 고향행 기차 안이라면 이 글을 읽는 시점으로는 가장 좋겠다. 비록 도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깊은 산골 출신만큼은 아니라 해도, 고향집과 동네에 얽힌 추억이 어찌 없으랴. 각자 어린 시절 추억을 한 번쯤 떠올려보시라고 마중물로 이 글을 쓴다.
지금은 반듯반듯하고 널찍한 길로 단장이 됐지만, 어릴 적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은 마치 큰길에 꽂아놓은 빨대처럼 좁았다. 그 길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똥차’다. 재래식 화장실에 똥이 차오르면 똥차 아저씨들이 와서 커다란 국자처럼 생긴 도구로 똥을 퍼내 양동이처럼 생긴 나무 똥통 두 개에 담은 뒤 어깨에 멘 긴 막대 양쪽 끝에 똥통을 걸어 똥차로 날랐다. 골목길을 달리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그 똥통과 ‘충돌’할 뻔한 일도 있고, 동네 개구쟁이들과 아저씨를 몰래 뒤쫓아가 똥통에 돌멩이를 던져 똥물이 튀기게 하는 못된 장난도 쳤다.
골목에 들어서면 함석으로 벽을 세운 집이 먼저 나오고 이어서 나무판자를 엇대어 벽을 삼은 집도 나왔다. 당시에도 6대 도시에 드는 도시였건만, 골목의 다른 편 끝으로 돌아서면 심지어 초가집도 있었다. 아버지 막걸리 심부름을 다니는 길목이었고 낮은 초가지붕 아래서 몰래 한 모금씩 목을 축이기도 했다.
봄이 와서 골목길의 땅이 보송보송해지면 구슬치기나 비석치기, 못꽂기 따위 놀이에 저녁 시간이 되는 줄도 몰랐다. 나무판자 벽 집에 살던 친구는 목소리가 우렁우렁한 어머니가 골목길에 나와 “밥 먹어라” 외치면 제일 먼저 쪼르르 집으로 달려갔다.
나무로 짠 우리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옥 건물이 커다란 ㄷ자로 나를 맞았다. 그 안엔 방 한 칸씩 세들어 사는 이웃들이 많았다. 연원은 모르겠으나 ‘캐리 할아버지네’로 불리던 노부부가 살았고, 직업이 기억나지 않는 중년 부부도 살았다. 캐리 할아버지는 가끔씩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긴 고무장화를 신고 낚시를 떠났는데, 미끼용 구더기를 키우는 상자를 가지고 있었다. 달콤한 카스테라빵을 구더기들한테 떼어주는 걸 보며 침을 꼴깍 삼키곤 했다. 중년 부부는 맞벌이를 했던 것 같은데, 신세경보다는 예쁘지 않지만 시골에서 올라온 ‘식모’ 누나를 두고 있었다. 그 누나를 따라 동네 조무래기들과 함께 극장 구경을 갔다가- 아, 류의 영화였던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무서워서 뛰쳐나온 기억이 있다.
ㄷ자 한옥의 가운데쯤 우물이 있었고, 동네 어른들이 가끔 그곳에 들렀다. 김장이라도 담글라치면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모두 모여 왁자지껄했다. 그리고 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방에 살던 민정이네 아저씨는 종종 그 우물가에서 닭똥집을 다듬었다. 송편처럼 생긴 닭똥집에 칼집을 내서 뒤집은 뒤 노란 내용물을 우물물로 씻어냈다. 아저씨는 포장마차를 했다. 재래식 화장실이 무섭던 어린 시절, 마당에 신문지를 깔고 일을 보다가 간혹 몇 살 아래인 민정이에게 들키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호시탐탐 민정이를 괴롭혔다.
어느덧, 함석 벽 집과 나무판자 벽 집이 헐리고 큰길이 집 앞까지 새로 났다. 때를 같이 해 이웃들은 하나둘 떠났다. 그 자리엔 모텔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도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지만 형편 넉넉하지 않던 사람들이 모여살던 우리 동네는 그렇게 모텔들에 둘러싸여갔다. 구멍가게를 하던 옆집은 이제 마당 가득 잡초가 우거진 폐가가 되어 모텔업자에게 팔릴 날을 기다리고 있다. 골목 끝에 사는 친구네 집이 아직도 우리 집과 함께 동네를 지키고 있다. 목사인 그 친구는 아이를 무척 많이 낳아 명절 때 만나면 이제 몇 남매인지 자꾸만 물어보게 된다.
이젠 섬처럼 덩그러니 남은 우리 집에서 아버지·어머니는 마당에 상추며 파를 키우며 살고 계신다. 그동안 새로 지은 집을 버리고 아파트로 이사가는 게 내키지 않으신다. 살갑던 이웃들이 모두 떠난 그 적적한 공간에서 모과나무도 잘 가꿔 추석 때마다 자식들한테 실한 열매를 나눠주신다. 동네는 번듯해졌다지만, 사람도 이웃도 추억도 모두 떠났다. 그들이 얼마나 더 나은 동네로 이사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근처로 이사간 민정이 어머니가 간혹 어머니의 말동무가 돼주시나 보다.
돈 있는 사람들은 신도시니 신시가지니 새 동네를 만들어 모여살게 되고, 골목길이 웅숭깊던 동네는 이렇게 시들어간다. 도시든 시골이든 ‘지방’이 고향인 이라면 고향집과 동네가 점차 번성하는 쪽보다 이런 쇠락의 길을 걷는 쪽이 더 많으리라. 물론 농어촌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어떤 동네든 고루 살기 좋아지고 세련돼져서 옛 이웃집 아주머니·아저씨들이 함께 오순도순 노년을 맞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국토 균형발전이니 지역 공동체를 살리는 지방자치니 하는 추상의 언어를 접할 때마다 여전히 선연한 저 골목길과 마당 가운데 깊었던 우물이 떠오른다.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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