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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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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우울

등록 2009-12-16 11:49 수정 2020-05-03 04:25

바야흐로 연말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벌어지는 술과의 격전을 치르는 와중에, 어느 조촐한 송년회 자리에서 조금은 생뚱맞은 열변을 토해 따사로운 분위기에 얼음물을 끼얹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요즘은 무슨 프로그램을 하느냐?”는 질문과 “ 한다”는 답변이 오간 뒤 나온 사람들의 반응이 사태의 원흉이었다.

“나는 그 프로 안 봐, 우울해져서”

당신의 우울.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당신의 우울.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난 그런 프로 모르겠는데?” 하는 무심함에 발끈할 만큼의 밴댕이 속은 아니다. 또 “뭐 그 프로그램을 하느냐?”는 노골적인 핀잔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내 표정에 각을 지게 만들었던 것은 오히려 “야 참 힘든 프로그램 하는구나” 하는 따스한 위로 다음에 따라붙었던 한마디였다. “나는 그 프로 안 봐. 우울해져서.”

시청률이 떨어질까봐서가 아니다. 친구들이 보든 안 보든 시청률에는 바이러스의 무게만큼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거기에 나는 해마다 저 멘트를 듣고 넘겼고, 심지어는 “나도 솔직히 안 봐” 하면서 맞장구까지 쳤다. 그런데 올해는 왜 그리 열이 났을까? 그것은 그들의 말에서 우울함에 대한 회피 아닌 외면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우울해지기 싫은 것이 아니라 우울한 현실을 네 삶에 개입시키기 싫어서가 아니냐’는 심술궂은 눈초리를 치켰다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바퀴벌레가 넘치는 방에 자식들을 가둔 채 세상과 문 닫고 살아가는 미친 여자를 굳이 지켜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녀가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아이들만 데리고 맨발로 도망친 이이며 그 막막함 속에서 병까지 얻은 것이라면 당신에게도 그 불행의 일말의 책임이 있다. 가정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둔감한 공화국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학대받은 지적장애인의 비참한 모습을 구태여 지켜보지 않으려는 심경은 안다. 그러나 그를 그렇게 방치한 것은 ‘노예’의 주인만이 아니다. 당신 역시 지적장애인에게 비정하고 무심한 사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비껴가기 어렵다는 뜻이다.

참담한 현장을 일삼아 쫓아다니는 처지이지만 며칠 전 철도 파업의 전말을 지켜보면서 나는 과거의 어떤 경험과 기억에 견주어도 크게 뒤질 것이 없는 무력감을 맛보았다. 파업의 이유를 따지기보다는 파업의 불편함에 우울해할 뿐이던 ‘선량한 시민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안정된 직장에 다니면서 왜 파업이냐?”는 대통령의 말씀을 들으며 그 느낌은 절정에 달했다. 불안정한 일자리, 즉 비정규직은 노조를 만들기조차 어렵고, 화물연대 같은 경우에는 ‘죽어도 당신들은 사장님이니 파업을 못한다’고 우기며, 경제가 어려워서 파업하면 안 되고, 심지어 가뭄이 들어도 파업은 언감생심인데, ‘안정된 직장’의 노동자들의 파업은 그 ‘안정성’ 때문에 눈 뜨고 보아줄 수 없다니, 대한민국에서 파업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파업해도 무방한 때는 언제일까.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가 불볕에 아이스크림 녹듯 사라지는 광경이 펼쳐져도 우리는 과연 우울해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그런 뉴스 안 봐. 괜히 우울해지니까”라고 퉁을 칠 수 있을까.

우울한 현실보다 더 무서운 것

취재를 끝낼 때마다 나는 다음과 같은 한탄을 빼놓지 않고 들었다. “이런 일은 TV에 나오는 줄 알았지, 우리 이웃에서 (또는 내 집에서)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우울할까봐 험한 프로그램은 보지 않았던 내 친구들도, 배부른 것들이 파업한다고 눈 부라린 사람들도 그런 일은 TV에나 나올 일이며 나에게는 절대로 해당 사항이 있을 수 없다고 치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우울하지 않을 것이고, 또는 머리띠 매고 악을 쓸 일은 절대로 내게는 닥치지 않을 것이고, 그런 것들은 TV에나 나올 일이라고 자신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울한 현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울한 현실에 대한 망각이다. 남이 왜 우울한지 이해하고 싶지 않아하는 게으름이다. 그리고 저 일은 절대로 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자신감이다.

김형민 S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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