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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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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란 말이냐, 아이야

등록 2009-12-16 10:46 수정 2020-05-03 04:25

1.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조 추첨이 끝난 뒤 각 ‘죽음의 조’를 가려내고 조별 16강 진출팀을 점치는 기사들이 폭주하는 가운데, 간간이 축구 스타를 꿈꾸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가난한 축구 이야기가 심금을 울린다.
몇 해 전 서아프리카 가나와 시에라리온에 취재 여행을 갔을 때 봤던 풍경이 또다시 떠오른다. 대서양의 드넓은 바다 속으로 침몰하는 적도의 태양이 두꺼운 구름을 뚫고 연분홍 커튼을 내릴 무렵, 바닷가 공터에서 몇 개의 팀이 뒤섞여 공을 차던 아이들의 모습이다. 서늘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던 회색빛 바다를 바라보며, 도로가에서 날품을 팔던 아이들과 소년병으로 내전의 참혹함을 몸으로 배워야 했던 아이들을 떠올리며, 축구가 마냥 즐거운 아이들의 생기발랄함을 겹쳐 보았다.
그 수탈과 빈곤의 대륙에서 첫 월드컵이 열린다니, 아이들은 딸떠 있겠다.
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은 어찌할 수 없다. 10억의 인구를 거느린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럽 상위 리그로 팔려갈 미래의 선수는 몇 명이나 될까? 그것은 아이들에게 몇%의 확률일까? 남아공 월드컵을 두근거리며 기다리는 세계인은 아프리카 아이들의 축구 꿈을 부풀리기보다는 그들에게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영양과 교육을 제공하는 데 가장 적합한 전법을 짜야 할 때가 아닐까. 아이들이 축구에 그토록 매달리는 건 축구가 좋아서라기보다 축구밖에 좋아할 게 없어서일 수 있다는 게 진실에 가깝지 않겠나.
그런데 또 하나의 이야기가 심금을 울린다. 치매를 앓는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기초생활수급권자 여고생이 매달 용돈 8만원에서 3만원을 쪼개 아프리카 우간다 어린이에게 기부하고 있단다. 그 돈으로 다른 일도 하고 싶지만 후원이 끊기면 아프리카 아이가 밥을 굶지 않을까 걱정됐단다.( 12월9일치 9면)

2.
어쩌란 말이냐, 아이야. 너보다 어른이고, 너보다 풍족하고, 너보다 입바른 소리 잘하는 나는. 어려운 너희에게 돌아갈 무상 급식 예산을 깎고, 예산 소요를 줄이고자 무상 급식 신청 절차를 까다롭게 만들고, 그렇게 신청자 수가 줄어든 것에 희희낙락하는 어른들의 각박함은. 따뜻한 밥을 먹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고, 꿈을 키우고, 아프리카 어린이를 돕는 기회까지 너희가 누려야 할 권리인데도 그마저 너희에게 떠넘겨버리는 이 풍족한 공동체, 대한민국의 무지는. 수만~수십만분의 1 확률로 승자를 가려내고, 그 과정의 기회의 균등은 눈여겨보지도 않으면, 뒤처져 빈곤 노동의 세계를 헤매는 나머지에겐 눈길도 주지 않는 이 정글의 야만은.
그 모든 것을 아프리카 아이들의 발랄한 발길질로 축구공처럼 멀리 차버릴 수 있다면, 학원 시간에 쫓겨 공 한번 맘껏 차보지 못하는 한국 아이들의 억눌린 발길질로 멀리 차버릴 수 있다면, 지구상의 모든 아이가 평등하게 웃으며 월드컵에 환호할 수 있다면, 지구처럼 또한 둥근 축구공처럼 너희의 어깨동무가 둥글 수 있다면….
어쩌란 말이냐, 아이야. 아이야, 아이야.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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