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동아시아의 자본과 노동 관계’에 대해 배우는 학생들에게 “일본에서 근대적 복지체제의 근간이 만들어진 것은 1937년 중국 침략 이후 상이군인과 퇴역 군인, 그리고 현역 군인들의 가족을 보살필 후생성이 1938년에 세워지고 나서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수많은 평민이 한꺼번에 총알받이가 돼야 자본주의 국가가 비로소 ‘복지’에 신경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경악한 한 노르웨이 여학생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전쟁이 없는 자본주의 문명은 과연 불가능한 것인가?”
강대국 간 서열 체제가 유지하는 평화이 질문을 듣고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없는 자본주의라고? 노르웨이처럼, 수류탄부터 미사일까지 온갖 무기를 생산·수출해 세계에서 7위 무기 수출국으로 군림하면서도 노벨평화상을 주는 등 ‘평화국’으로 행세하는 나라는 일단 외면상 전쟁을 국내에서 비가시화할 수 있다. 노르웨이산 무기로 아프간의 미군이나 가자지구의 이스라엘군이 미성년자 ‘테러리스트’를 아무리 많이 살육해도 이를 많은 노르웨이인들은 그저 몰라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노르웨이와 같은 군소 핵심부 국가가 전쟁으로 돈을 벌면서도 표면적으로 ‘평화국’으로 남는다 해도, 노르웨이도 속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전쟁 없이 굴러갈 수 있다는 것은 순진한 꿈에 불과하다. 세계 산업자본주의란 전쟁 속에서 태어나고 전쟁을 먹고 자랐다. 자본주의 국가에 “전쟁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사냥꾼에게 불살생계를 설법하는 일과 다를 게 없다.
정치외교학계 일각에서 “민주국가 사이의 전쟁은 없다”라는 ‘법칙’을 가끔 들먹이지만, 일소에 부칠 만한 난센스일 뿐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맞붙은 입헌군주국 영국과 독일은 당대 기준으로 봐서는 ‘민주국가’ 대열에 속했으며, 10년 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의 공습을 당한 세르비아도 발칸반도의 기준으로 봐서는 ‘민주국가’였다. 1945년부터 오늘날까지 ‘정통 열강’이라고 할 미국·영국·독일·프랑스·일본 등이 더 이상 서로 싸우지 않은 이유는 냉전시대 소련부터 오늘날 중국까지 그들에게 공동의 외부적 적대자 내지 잠재적 경쟁자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1945년까지 각종 대규모 전쟁에서 이미 그들 사이의 ‘서열’이 정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컨대 미국이 영국(1812∼15년 전쟁), 독일(제1·2차 대전), 일본(제2차 대전) 등을 차례로 패배시킨 상황에서 미국의 군사적 우월성을 인정하는 것은 불가피해졌다. 그런데 이 서열이 정해지는 과정은 전쟁의 연속이었고 바로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가 성장해왔다.
시장주의자들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들먹이기 좋아하지만, 오늘날 시장을 실제로 쥐락펴락하는 손은 장님이 아닌 이상 누구에게도 잘 보인다. 미국 경제에 1조달러가량의 ‘구제금융’을 아낌없이 부어버린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등의 손이다. 사실 국가가 매개체가 돼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거대은행들의 부실경영을 책임지고 그 부족분을 채워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과연 미국이라는 국가는 자본주의적 시장을 이처럼 ‘유지·육성’하는 역할을 언제부터 맡은 것인가?
화폐 통일도 안 됐던 미국이 강해진 배경이는 ‘전쟁’을 빼면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남북전쟁(1861∼65)을 앞둔 미합중국은, ‘중앙집권적 국가’라 하기 어려울 만큼 지방분권적인 정치체였다. 1837년부터 중앙은행 기능이 정지돼 1365개 주립·사립 은행이 각자 다르게 지폐를 찍어내는 ‘화폐 다원주의’ 국가이기도 하고, 상비군이 2만8천 명밖에 되지 않는 지방 민병대 위주의 ‘군사 다원주의’ 국가이기도 했다. 이러한 ‘느슨한’ 국가를 오늘날 군사적 제국이자 하나의 경제단위로 만든 것은 남북전쟁이었다. 전쟁이 호기가 돼 화폐 발행권을 국가가 독점한 것은 물론, 1861년 8월5일부터 그때까지 미국 역사상 없던 연방 소득세가 최초로 전국적으로 부과됐다. 국가가 국내 부의 상당 부분을 독점해버린 것이다. 이 돈은 전쟁 말미에 약 100만 명이 된 연방 군대를 위해서도 쓰였지만, 갑자기 팽창해버린 관료기구들을 뒷받침해주기도 했다. 남북전쟁이 없었다면 과연 보호관세와 철도 부설 지원 등을 통해 미국 자본주의를 ‘키워줄 수 있는’ 강력한 연방국가가 태어났겠는가?
은행에의 ‘구제금융’ 등을 통해 시장을 주도할 수 있는 오늘날 간섭주의적 국가는,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 뛰어들려는 미국이 군수산업 육성을 위해 일체의 산업경제에 대한 개입 권한을 가진 전쟁산업국(War Industry Board)을 신설하고 나서 탄생했다. 전비 지출로 미국 연방국가의 지출 전체가 2년 만에 약 20배, 7억달러에서 190억달러까지 늘어났다. 그렇게 해서 ‘만능국가’가 태어난 것이다.
그러면 자본가들이 전쟁 비용을 증세와 국채 발행 등 사실상 인플레를 통해 조달하는 ‘국방국가’의 탄생을 반긴 이유는 무엇일까? 군수공업 같으면 그 대답은 자명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개개인 자본가의 전쟁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 자본가 계급 전체로서 전쟁은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전쟁이 가져다주는 ‘특수’, 즉 산업 호경기가 없는 이상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되는 자본주의 경제는 장기적으로 지탱되지 않기 때문이다. 후발주자가 늘 뛰어들어 언젠가 시장이 포화되면서 출혈경쟁으로 이윤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소비재와 달리, 무기와 같은 ‘유사 자본재’의 수급과 가격 등은 시장과 거의 무관하게 사실상 독점에 가까운 생산업체와 정부의 담합으로 결정된다. 그러기에 주기적 불경기로 소비재 시장이 위축될 때 적당한 투자처가 없는 엄청난 잉여자본을 가격이 안정적인 무기 생산에 쏟아부어 불황을 유보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중요한 운영 기법이다. 미국 자본의 시각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한번 보라. 중앙정부의 세입이 약 4배로 느는 등 자본가가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했지만, 1916∼18년 공업 생산량이 40%나 늘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을 대공황에서 회복시켜준 일등 공신이기도 했고, 그 총생산량을 800억달러에서 1300억달러어치로 키워 세계경제 초강대국으로 만든 ‘황금의 계기’이기도 했다. 한 아나키스트의 말대로 전쟁은 실로 ‘국가의 건강’ 그 자체였다.
자본주의 경제가 전쟁을 먹고 자란다는 말은 또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흔히 이용하는 절대다수의 민간 부문 기술들은 전쟁을 계기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이후에 바로 여객기로 변신한 두글래스 DC-6 병력 수송기나 역시 군대 운반의 필요성을 염두에 두고 확장된 철도, 1989년이 돼야 군수 첨단기술 산업 관련자들의 전유물에서 상업적 상품으로 탈바꿈한 인터넷 등은 정부가 지원하는 군 관련 기술 개발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대변해준다.
그런데 과연 19∼20세기의 총력전, 즉 ‘일체 국민 단결’과 총동원을 수반하는 전쟁의 시대가 바꾼 것은 사회의 ‘하드웨어’뿐인가? 사회의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조직도 일상화된 전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우리는 복지국가를 통상 ‘사회민주주의의 산물’로 보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국가적 복지체제를 크게 발전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국민에게 초등교육을 하고 다수의 남성을 군에 징병해 전장에 보내야 했던 ‘총력전 국가’가 국민 다수를 이루는 빈민·노동층의 생존을 담보해주고 그 충성심을 보장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유럽 복지국가 건설의 선두주자인 독일 같으면 노후연금법과 병가수당법, 실업수당법 등을 1880년대 초반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숙적인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그 목적은? 언제든지 기꺼이 총알받이가 돼줄 ‘국민’의 창출이었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노동자 계층을 중산층화한 하나의 계기는 바로 다수가 노동자 출신이던 퇴역 참전군인에게 무상 고등교육 기회 등을 준 1944년의 ‘퇴역군인 대우법’(GI Bill)이었다. 그 뒤 한국에서, 베트남에서, 이라크에서 수많은 ‘열등한 타자’를 도살하면서 스스로도 죽어야 할 제국의 총알받이들에게 일단 ‘당근’부터 지급해야 했다.
그러면 모든 국민을 ‘아군의 승리’에 열광하는 총력전의 ‘능동적 공범’으로 만들려는 국가의 목적은 달성됐던가? 모든 경우에 꼭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제1차 세계대전이 빚어낸 독일과 러시아의 혁명이 말해주지만,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과 포섭의 도가 크게 높아지기만 하면 대중 총동원의 성공을 거의 보장할 수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전시에도 국가가 주선해주는 단체관광을 즐기고, 전후에 개인 승용차와 단독주택을 공급받을 거라고 약속받고, 나치당과 무장 친위대 등을 통해 여태까지 상상 못한 벼락출세의 가능성을 얻은 수많은 ‘순혈 독일인’ 노동자가, 설령 아우슈비츠에서 매일 수천 명의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등 ‘불온 분자’가 죽어나간다는 것을 알았다 한들 과연 히틀러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겠는가.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을 이젠 다 알아도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수많은 한국인의 의식을 봐도 알 만한 일이다. 비교적 약체인 독일이나 일본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부 좌익이 기대한 ‘노동계급의 반란’이 끝내 없어 극소수의 반전 저항에 그치고 말았지만, 강자인 미국에 제2차 세계대전은 당시나 지금이나 ‘좋은 전쟁’으로 대인기를 유지했다. 다수의 주류 백인이 경멸한 ‘황인종 일본’을 주적으로 삼은 것도 대만족이었지만 대공황 때 23%에 달했던 실업률이 전쟁 특수와 대량 징병으로 1%로 떨어지고 워싱턴 근로자의 실질소득이 전쟁 호경기로 42%나 늘어나지 않았던가. 전체주의적 파시스트 독일이든 허울 좋은 ‘민주주의’의 미국이든 적어도 ‘주류’에 속하는 대중이 ‘경제를 살리고 아국의 위세를 높이는’ 대량 학살에 대부분 열광했다는 것은 ‘극단의 시대’(홉스봄)의 가장 아픈 교훈 중 하나다.
홀로코스트는 근대성의 당연한 산물한때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나 전시 일제의 ‘일억옥쇄’(一億玉碎)의 집단 광풍 등을 ‘후발 발전국의 후진성을 증명하는 예외적인 야만’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했지만, 지금의 학계에서는 오히려 홀로코스트를 ‘근대성의 당연한 산물’로 보는 지그문트 바우만 교수의 설이 유력해지고 있다. 사실 규모와 방법에는 차이가 있지만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기계적으로 학살한 것이나 한국전쟁 때 이북 지역에 65만t의 폭탄을 퍼부어 ‘원시 상태’로 돌아가게끔 한 것이나 결국 똑같은 기계화된 대량 살육의 유형에 속하는 일이다.
위에서 보여준 대로, 이 대량 살육의 주기적 반복 없이는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는 그 경제적 균형도 ‘계급평화’의 허상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다. 그러기에 1945년 이후부터 이어져온 ‘장기 평화’, 즉 주요 강대국 사이의 대규모 열전 부재 상태는 거시적 시각에서 어쩌면 ‘예외’에 속하는 것일지 모른다.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새로운 홀로코스트와 새로운 히로시마들이 우리를 꼭 기다릴 것이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참고 문헌:1. Martin Van Krevel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2. James Anderson (ed.), Harvester Press, 1986.
3. Ernest Mandel, Verso, 1975
4. <modernity and holocaust> Zygmunt Bauman, Cornell University Press, 1989.</mod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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