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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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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합법적 살인과 성폭행의 제전


적에 대한 잔혹 행위를 통해 집단의 단결 고취했던 전쟁… 추앙받는 정복전쟁 이면의 참상도 돌아보길
등록 2009-10-28 18:41 수정 2020-05-02 04:25

12년 전쯤, 스승인 모스크바대 미하일 박(박준호·1918~2009) 교수의 일생일업인 의 러시아어 번역을 도우면서 ‘열전’에 있는 김유신전을 번역한 일이 있었다. 그때 다음과 같은 김유신(595~673)의 ‘민심 살펴보기’가 내게는 재미있는 수수께끼로 다가왔다.

전쟁 조직 그 자체였던 고대국가

“무신년(648)… 유신은 압량주(경북 경산시 압량 지역)의 군주(軍主·지방관)로 있었는데 마치 군사에 뜻이 없는 것처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놀며 몇 달을 보내니, 주(州)의 사람들이 유신을 용렬한 장수라고 생각하여 헐뜯어 말하기를 ‘뭇사람이 편안하게 지낸 지가 오래되어 남는 힘이 있어 한번 전투를 해봄직한데 장군이 용렬하고 게으르니 어찌할 것인가’ 하였다. 유신이 이 말을 듣고 백성을 한 번 쓸 수 있음을 알고는 대왕에게 고하였다. ‘이제 민심을 살펴보니 전쟁을 치를 수 있습니다.’”( 권 41)

니콜라 푸생의 명작 (1634~35). 적국 여성의 납치는 마치 남성적이고 영웅적인 행위인 듯이 그려진다. 보는 이를 흥분시키는 강력한 폭력의 이미지들에서 성적 폭력에 대한 도덕적 책망이나 피해자의 심정에 대한 배려 등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사진 한겨레 자료

니콜라 푸생의 명작 (1634~35). 적국 여성의 납치는 마치 남성적이고 영웅적인 행위인 듯이 그려진다. 보는 이를 흥분시키는 강력한 폭력의 이미지들에서 성적 폭력에 대한 도덕적 책망이나 피해자의 심정에 대한 배려 등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사진 한겨레 자료

이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반신반의했다. 살아남을 보장도, 주검이나마 가족들이 수습할 수 있다는 보장마저도 없는 전쟁을, 신라 평민들은 과연 그렇게 환영했을까? 전쟁을 ‘재앙’으로 보는 오늘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김유신의 전쟁들을 합리화하려는 신라 말기 의 저자 김장청(金長淸)이나 그 행록을 기반으로 김유신전을 편집하면서 김유신을 더욱 영웅화한 김부식(金富軾·1075~1151)의 윤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의문을 미하일 박 교수에게 여쭈니 응답은 의외였다.

“우리 상식과는 다르지만, ‘전쟁은 국가의 건강’이라는 한 아나키스트의 풍자적 발언이 어떤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긴 하지. 근현대 대국들도 그렇지만, 고대사에서는 국가란 바로 전쟁 조직부터 의미했지. 신라도, 다른 어떤 고대국가도 다 전장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라들이야. 전쟁을 수행하면서 국가의 수취·행정 체계도 단련됐지만, 일면 피착취 계급인 평민들에게 이익이 전혀 돌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 전공(戰功)이 있으면 고대국가에서 평민도 제한된 범위 안에서 출세가 가능했거든. 이 출세를 시켜주면서 전쟁을 하는 국가가 민심도 달래고 군민(君民) 일치의 허상도 과시했지. 어쨌든 평민 남성에게는 전쟁이란 위기인 동시에 기회였으니 전쟁을 좀 바랐을 수도 있었지. 참, 내 말을 기억하게. 지금 개판이 된 러시아도 전쟁을 대단히 필요로 하는 때야. 머지않아 다수의 국민이 환영할 어떤 전쟁이 올 것 같아.”

제2차 체첸 전쟁(1999~2000), 즉 체첸 독립운동에 대한 러시아의 무자비한 탄압을 앞두고 나온 그 이야기는 ‘예언’에 가깝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전근대 사회에서 전쟁의 특성을 짚어준 것이었다. 전시에 양민 장정들을 동원할 수 있던 고대사회에서도, 전문화된 상비군을 특징으로 하는 중세사회에서도 전쟁이란 국가의 주업이었다. 특히 국가 형성 과정이 진행 중이던 고대사회에서는 전쟁이 국가의 산파역을 맡았다.

첫째, 전승은 약탈을 통한 승전국 지배층의 치부를 가능케 했다. 전쟁이 아니라면 자국민에 대한 부세(賦稅) 착취를 통한, 민심 이반을 가져올지도 모를 치부만 가능했겠지만, 승전은 정치적 부담이 없는 약탈의 기회를 의미했다. 남북한 양쪽 민족주의자들은 광개토왕을 ‘민족 상징’으로 내세우지만, 그의 비문에 따르면 395년 비교적 세력이 미미한 비려(碑麗·글안족의 일파) 등 고구려 주변의 부족사회들을 공격해 “수많은 소와 말, 양떼를 노획”하는 등 노골적 약탈전쟁을 일삼은 게 그 치세의 특징이었다(영락 5년, 을미년 기사 참조). 407년에도 백제 내지 선비족의 후연(後燕)으로 추정되는 상대방과의 큰 싸움에서 1만여 개의 갑옷을 노획하는 등 ‘민족 영웅’이 전개했던 전쟁들의 실리적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영락 17년, 정미년 기사 참조).

평민에게는 출세의 기회이기도
광개토왕의 전쟁에 대한 우리의 상상을 반영하는 이 ‘낭만적이고 영웅적인’ 이미지에서 전쟁 피해자를 향한 관심은 일절 보이지 않는다. 사진 한겨레 자료

광개토왕의 전쟁에 대한 우리의 상상을 반영하는 이 ‘낭만적이고 영웅적인’ 이미지에서 전쟁 피해자를 향한 관심은 일절 보이지 않는다. 사진 한겨레 자료

둘째, 전쟁은 노비 획득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무제한적 착취가 가능한 노비를 이용하는 것은 국가 및 귀족층에 의한 잉여가치 수취와 축적의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평생 64개 성, 1400개 촌을 무너뜨렸다고 그 비문에서 찬양받는 광개토왕은 396~398년에만 해도 백제와 숙신족 등을 공격해 노비 1300여 명을 획득할 수 있었다(영락 6~8년, 병신년~무술년 기사 참조). 광개토왕과 함께 최근 텔레비전 드라마 덕분에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사다함은 562년 대가야를 침공·격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하여 가야 포로 300명을 노비로 하사받을 수 있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권 44). 고대 전쟁이란 이득이 가장 많이 나는 ‘노예’라는 생산기계를 얻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봐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물론 총인구 중 노예의 비율이 30~40%에 달했던 로마제국 초기(기원전 1세기 말)에 비하면, 노비의 비율이 5~10% 정도로만 추정되는 고대 한반도 삼국은 ‘노예 착취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전쟁통에 노비 획득을 도모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셋째,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전쟁은 무기 개발을 중심으로 한 국가 주도의 기술 발전을 촉진했다. 예컨대 백제·가야와의 치열한 전쟁이 한창이던 558년 신라에서 고대의 대포라고 할 수 있는 커다란 쇠뇌(기계식 활)를 발명했다. 7세기 중반, 이 신기술을 빼내느라 일본은 물론 당나라에서까지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적이 있었다. 중앙의 병부에서 제작하는, 지방 마을의 대장장이들은 도저히 모방해 만들 수 없는 우수한 무기를 확보한 국가는 지방세력이나 기층민중의 저항을 무찌르고 광역 지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6~7세기 신라 지방 행정관이- 위에서 언급한 김유신처럼- ‘군주’로 불렸으며 축성과 군사작전 등까지 지휘했던 것은, 전쟁 조직과 초기 지방통치 조직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잘 말해준다.

마지막으로, 각종 사회·경제적 갈등이 늘 잠복해 있던 착취-피착취 계급의 관계를 전쟁이 일시적으로나마 순조롭게 만들 수 있었다. 평소 모순에 얽혀 있던 귀족과 양민, 부자와 빈민 등은 전시만 되면 하나의 ‘약탈 동맹’을 잠시나마 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신라에서는 백제·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운 지방의 평민도 전리품과 함께 하급 관위 정도를 받을 수 있었다. 668년 평양성 싸움에서의 전공을 논해 행상을 한 문무왕(재위 661~681)은 머나먼 비렬홀(함경도 안변)의 무명 평민인 세활에게 고간(高干)이라는 외위(지방민을 위한 관위)와 조 500섬을 내려준다. 이는 전쟁을 통한 ‘출세’의 좋은 본보기다. 평양성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다고 하여 관위와 보상을 받은 신라 평민은 8명이나 된다. 전쟁으로 인한 파격적 출세의 경우들은 그 전후에도 꽤 많았다. 661년 자신의 목숨을 걸고 김유신의 편지를 당나라 군대에 전달한 열기와 구근 등의 무명 양민들은 사찬(8등) 관등을 얻어 나중에 지방관으로까지 발령나지 않았던가( 권47).

대외적 약탈이 대내적 갈등 봉합

전쟁은 곧 ‘기회’였던 만큼 위에서 나온 압량주 사람들의 ‘전쟁열’ 이야기를 꼭 지배층의 선전으로만 볼 수도 없는 것이다. 물론 성공적인 대외 약탈전쟁 덕택에 기원전 167년부터 모든 로마 시민의 세금을 면제해주고 점령지에서 거둬들인 재물로 국고를 채울 수 있었던 로마에 비해, 신라의 전쟁들이 평민에게 가져다준 시혜적 효과는 미미했다. 그럼에도 근본적으로 ‘남’을 같이 공격해 약탈하는 게 ‘우리’ 집단 안에서의 계급 갈등을 완화해준 것은 마찬가지였다.

전장에서 ‘우리’의 단결을 높이는 최적의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남’에 대한 끔찍한 잔혹행위다. 경쟁 조직과의 싸움에서 누군가의 피를 한번 흘려본 행동대원만이 일종의 ‘공범 의식’이 생겨 진정한 조직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조폭 세계의 법칙이다. 그렇듯 군인 사이의 연대도 적의 주검을 밟는 순간에 공고화된다. 전쟁 자체도 살인 행위지만, 전통사회의 수많은 전쟁들은 패배한 적군에 대한 잔인한 살육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포로를 곧바로 노예로 만들 수 없을 때, 또는 포로를 죽여 적국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을 때 포로에 대한 살육이 잇따르곤 했다. 이같은 사건 중에서는 가장 악명 높은 것은, 기원전 260년 장평 전투에서 조나라 군대를 대패시킨 진나라 백기(白起) 장군이 포로 40만 명을 집단으로 생매장하는 등 무자비한 방법으로 떼죽임시켰던 일이다.

백기의 잔혹성은 그나마 후대의 동아시아 사학자들에게 비난이라도 받았지만, 1415년의 아쟁쿠르 전투에서 영국의 헨리 5세가 프랑스를 대패시켜놓고 “포로들이 재무장해 다시 싸울 확률이 있다”는 핑계로 포로 수천 명을 학살한 것은 영국의 연대기는 물론 프랑스의 연대기에서조차 별로 비난을 받지 않았다. ‘패배’를 ‘필수적 죽음’과 연결시키고 전장에서의 모든 살인을 무조건 정당화하는 의식은 그만큼 강력했다. 물론 포로의 가족으로부터 몸값을 받고 포로를 놓아주는 것도 유럽 중세 전쟁의 관습이었지만, 포로 살해에 대한 이렇다 할 제재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적병은 상황 종료 이후라 해도 ‘정당한 살인’의 대상이었지만, ‘적국의 여성’을 기다리는 것은 대개 성폭행과 노예화였다. 사실, ‘남’의 여성에 대한 각종 성적 착취의 가능성이야말로 전쟁 때 ‘아군’을 가장 잘 단결시키는 요소였다. 남성이 결혼 상대자를 납치하거나 납치하는 시늉을 하는 ‘약탈혼’이 가부장제 초기의 대표적 모습의 하나였기에, 전시에 적국 여성을 성폭행한 뒤 본국으로 데려와 소실 겸 노비로 삼는 것은 상당수 문화권에서 당연시됐다.

최근까지 유럽 지식인의 필수 교양이던 로마 역사와 신화의 한 중요한 부분은 로마 건국 초기(기원전 7세기)에 여성이 부족한 로마 장정들이 이웃 사빈(Sabine) 부족의 여성을 집단으로 납치한 뒤 사빈 부족 남성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는 반(半)설화적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사빈 여성의 납치와 성폭행’은 프랑스의 니콜라 푸생(1594~1665)부터 파블로 피카소(1881~1973)에 이르기까지 서구 미술의 고전적 소재였다. 대다수 그림에서 ‘적국 여성 납치’를 단행하는 로마 남성들은 ‘아름다운 영웅’으로 그려지곤 했다. 그만큼 전근대 전쟁의 이미지는 애당초부터 성적 폭력이라는 요소를 ‘당연하게’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며 정복왕 추앙?

한반도의 전근대 전쟁에 대한 우리의 통상적 인식은 이율배반적이다. 일면으로는 “우리나라가 남을 침략한 적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란 것을 자랑으로 삼는 등 자국의 이미지를 “가해한 적이 없는 영원한 외침의 피해자”로 만들려고 한다. 또 일면으로는 와 같은 대중문화 작품부터 ‘광개토대왕함’이라는 구축함의 이름까지 정복자 광개토왕이 ‘우리’를 상징하게 한다. 우리에게 ‘외침의 착한 피해자’라는 이미지와 함께 ‘고대로부터 상무적 민족’이라는 이미지가 절실히 필요한 셈이다.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나 민족주의자들이 고대·중세의 장군들을 ‘우리 민족 상무정신의 상징’으로 내세우기에 이런 현상이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숙신 부족들부터 백제의 민초들까지 광개토왕의 ‘찬란한 국토 확장’의 피해자들도 기억해주는 게 더 성숙한 태도가 아닐까. 전통사회에서 전쟁들이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남성들을 단결시켜주는 효과는 있었지만, 오늘날에 와서까지 그런 의식에 현혹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남’을 상대로 해서 벌인 정벌들이 ‘남’들이 ‘우리’를 침략해 들어온 전쟁보다 ‘덜 나빴다’는 의식도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1107~1108년 ‘여진 정벌’ 때 “적의 머리 6천 급을 베었다”고 스스로 자랑하고, “오랑캐는 외모는 사람이지만 마음은 짐승”이라고 평소에 믿었던 윤관(1040~1111)을 여진이나 그 후손인 만주족이 ‘침략자’로 여긴다 해도 우리가 반대할 여지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침략을 벌였든 침략을 당했든, 계급사회 지배관계의 가장 야만스러운 측면들을 집중적으로 나타내는 살인과 성폭행, 약탈의 제전이라는, 전쟁의 본질은 그대로였을 것이다.

참고 문헌:

1. 신형식, 삼지원, 1990, 39~44쪽

2. 박남수, 신서원, 1995, 91~169쪽

3. 고구려연구회 엮음, 학연문화사, 1996, 751~787쪽

4. Michael Man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Vol. 1, pp. 256~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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