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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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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감사합니다

등록 2009-10-14 01:20 수정 2020-05-02 19:25

메르세데스 소사가 삶을 놓았다. 향년 74.
아르헨티나의 반독재 투쟁 속에서 저항의 노래로 민중의 사랑을 받던 가수. 1970~80년대 독재 치하에서 망명까지 했어야 할 만큼, 그의 노래는 오선지를 떠나 권위주의적 지배자들의 가슴으로 꽂혔다. 아니, 잠만 깨면 누군가 사라지고 끔찍한 주검이 발견되는 남아메리카의 지옥 같은 시대에도 매일 아침 떠오르는 해를 보며 하루하루 싱싱한 삶을 살아가던 민중의 가슴으로 그의 노래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권위주의적 지배자들은 그 점을 더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부른 대표적인 노래 (Gracias a la Vida)를 들으면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1989년 아르헨티나에서 미국 포크송 가수 조앤 바에즈와 함께 부른 노래가 압권이다.
한 누리꾼이 아름다운 가사 번역과 함께 노래 파일을 블로그에 올려놨다((http://blog.naver.com/min4min1008?Redirect=Log&logNo=50024460053).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눈을 뜨면 흑과 백을 완벽하게 구별할 수 있는
두 샛별을 내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높은 하늘에는 빛나는 별을,
많은 사람들 중에는 내 사랑하는 이를 주었습니다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밤과 낮에 귀뚜라미와 카나리아 소리를 들려주고
망치 소리, 터빈 소리, 개 짖는 소리, 빗소리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그토록 부드러운 목소리를
녹음해 넣을 수 있는 넓은 귀도 주었답니다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생각하고 그 생각을 주장할 수 있는 언어와
소리와 알파벳을 선사하고
어머니와 친구와 형제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의
영혼의 길을 밝혀주는 빛도 주었고요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피곤한 발로 진군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나는 그 피곤한 발을 이끌고 도시와 늪지
해변과 사막, 산과 평야
당신의 집과 거리, 그리고 당신의 정원을 거닐었습니다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인간의 정신이 열매를 거두는 것을 볼 때
악에서 멀리 떠난 선함을 볼 때
그리고 당신의 맑은 눈의 깊은 곳을 응시할 때
삶은 내게 그 틀을 뒤흔드는 마음을 선사했습니다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내게 웃음과 눈물을 주어
슬픔과 행복을 구별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슬픔과 행복은 내 노래와 당신들의 노래를 이루었습니다
이 노래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노래입니다
모든 노래가 그러하듯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이 아름다운 노랫말에 권위주의적 지배자들은 떨었을 것이다. 하늘의 넓이를 닮은 성량으로, 나무의 푸름을 닮은 음색으로, 그리고 기름진 대지처럼 검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그는 노래했다. 우리의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 아름다운 향유를 방해하는 자는 끝내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메르세데스 소사의 부음은 전세계 주요 매체에 실렸고, 유튜브에 올라온 그의 공연 동영상에는 세계인들의 추모사가 댓글로 달렸다. 스페인어는 물론이고 영어, 러시아어, 독일어, 아랍어로 전세계 청중의 애달픈 마음이 매달렸다. 민주주의를 사랑하고, 다른 지역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공감하고, 또 다른 지역의 권위주의적 통치체제의 부활에 분노하는 이들의 목소리다. 영어로 쓴 한 누리꾼의 말이 그를 대변한다.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을 대신한 그의 목소리는 이제 잠들었습니다. 그의 음악이 영원하기를. 이제 당신은 천사들의 합창에 참여하겠군요. 그곳에서 이 땅을 굽어보세요. 우리는 당신의 음악을 영원토록 간직하리다.”
21세기, 권위주의적 지배자들이 다시 지배하고 있는 이 땅의 비참에 대해 여기선 더 이상 구구하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누구나 안다. 오로지 삶에 감사하고 싶다.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향유하리라는 굳은 의지를 저 선율에 담을 뿐이다.
다만 가시지 않는 물음. 저 아줌마들에게 삶의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저들은 삶의 어떤 갈피에 감사할까?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노래하고픈 저마다의 가사를 적어뒀을까? (표지이야기 참조)
나는 모른다.
R.I.P. 메르세데스.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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