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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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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으로 ‘왕’이 된 최초의 사람

비주류가 천하의 길로 나선 과정은 실로 가시밭길, 시대의 고난을 대중과 역사의 근육으로 바꿔내다
등록 2009-08-26 17:30 수정 2020-05-03 04:25
지난 2000년 청와대를 방문한 전국 35개 분교 학생들을 만난 김대중 당시 대통령 부부가 아이들의 손을 잡으며 격려하고있다. 김대중은 이렇게 외떨어진 비주류들의 주류이자 아버지였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 2000년 청와대를 방문한 전국 35개 분교 학생들을 만난 김대중 당시 대통령 부부가 아이들의 손을 잡으며 격려하고있다. 김대중은 이렇게 외떨어진 비주류들의 주류이자 아버지였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는 아버지였고, 스승이었고, 민주사회에서는 드물게 ‘군주’였다. 민주화 역정을 거치면서 ‘군사부’ 일가를 이룬 유일한 사람. 시련을 뚫고 살아오는 의로운 생불, 활불이었다. 평화와 통일의 수도사이자 전도사였다. 한국 사회에서 ‘천형’인 호남 출신에, 학력 별무로, 다섯 번 죽을 고비를 넘긴, 무엇보다 그는 단군 이래 ‘평민’으로 처음 왕이 된 자였다. 그는 모든 비주류의 대표였다. 그는 모든 패배에서 일어서, 쓰러진 자들의 아우라이자 사표였다.

박정희의 지원을 돌파하고 국회의원으로

그는 세 가지의 신산스런 원죄와 득죄를 뒤섞인 운명으로 뒤집어쓴 채 앞으로 나아가야 했던 팔자였다. 섬에서 태어난 소작농 출신의 아들로, 고졸 학력에, 돈도 사회적 배후도 없는 이에게 미래는 잘해야 쓰라린 오늘의 반복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식민지 시대 성장기 경험이 그에게 남겨준 건 고향 하의도의 토지 수탈, 조선어 교육 폐지 등에서 형성된 저항감이었다.

세 번 국회의원에서 떨어지면서 첫 아내가 죽었다. 어렵게 보궐선거(인제)에서 당선했지만 5·16 쿠데타가 일어나 사흘짜리 국회의원으로 경찰에 끌려갔던 그는, 한 번 더 출마해서야 정식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 7대 국회의원 선거(1967)에서 박정희는 백범 암살 당시 경교장을 지키던 헌병 대위에서 헌병감을 거쳐 체신부 장관이 된 김병삼을 김대중의 대항마로 목포에 내세웠다. 그 포구에 다른 지역보다 빨리 ‘다이얼 전화기’가 등장하게 된 건 오직 그 선거 덕이었다(물론, 박정희 정권이 설치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남녘 포구에 내려와 주재하면서까지 공화당 후보를 지원했지만 김대중은 이를 돌파해내고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의 삶에서 어쩌면 처음으로 승리다운 승리였다. 요컨대 정치인 김대중에게 정치라고 하루아침에 성공을 가져다준 건 결코 아니었다는 뜻이다.

대통령 선거도 4수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기억할 만한 해외 정치 지도자 가운데 대권에 네 번씩 도전한 이가 있다는 걸 듣지 못했다. 그에게 쉬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도전한 거의 모든 것에서 쓰러졌고 그 자리에서 진흙을 묻힌 채 기꺼이 몸을 일으켰다. 비주류인 그가 천하의 길로 나서는 과정은 실로 가시밭길이었다.

의문의 교통사고, 도쿄 납치 사건,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사형선고 등 알려진 대로 그는 다섯 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투옥, 망명, 연금이라는 끔찍한 상황들이 그에게서는 차라리 소박해 보일 지경이었다. 빨갱이라는 너울은 그가 세상을 뜬 이 순간에도 그를 공격하는 무기로 작동하고 있다. 분단 체제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치인들에게 씌웠던 이념의 용수갓을 반대자들은 한 번도 벗겨준 적이 없었다. 그것은 늘 지역감정을 밑밥으로 깔고 음모적 계략을 은닉한 채 덮쳐왔다. 여기에는 비주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괄시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의 출신과 성장 배경, 그리고 전라도는 그 자체로 거대한 비주류였다.

그러므로 상처 입고, 억울하고, 분하고, 한 맺히고, 버림받은 자들이 그와 동일시하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자연인이든 정치인이든 김대중이 겪고 당한 것들은 힘없는 저자의 백성들에게 강한 설득력을 갖게 하기 충분했다. 그는 삶 자체가 설화였다. 동시에 이는 그를 가장 증오하게 만드는 근거이기도 했다.

그는 한국 사회의 거대한 모순과 깊은 저주의 골짜기 사이에 핀 꽃이었다. 그 꽃의 이름이 인동초다. 따라서 그의 영광은 언제든 쓰디썼고, 불행히도 저주의 새 뿌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한 게 바로 변치 않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들이 꿈꾸는 세계와 가치를 향해 고난에 찬 역정을 마다하지 않았다.

술자리에만 앉아도 부르고 싶은 ‘선상님’

그가 연금되면 한국 민주주의도 막혔고, 그가 외치면 함께 울부짖고, 그가 노래하면 따라 합창했다. 그가 고통받는 만큼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해갔다. 그는 살아서 이미 순교자였다. 박해와 수난이 거듭될수록 인권에 대한 그의 의지와 신념은 더욱 강화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심장 박동으로 민주주의의 시계 소리를 들었다. 한국의 민주화 역사는 곧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과 일치한다.

나아가 그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타자기’였다. 그의 발언이 찍힌 자리에 새로운 민주의 이정표가 들어섰다. 돌이켜 읽어도 생동하는 어록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세계인들은 그의 언행에서 아시아 민주주의의 발전과 변화를 읽어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신념이자 삶인 민주·통일·평화가 무너지는 일은 견뎌내기 어려웠을 게 분명하다. 한국 대중에게 김대중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형성되었다. 그의 삶과 가르침은 아버지와 스승이 부재한 한국인들에게, 특히 지지자들에게는 술자리에만 앉아도 부르고 싶은 ‘선상님’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는 때로 종교보다 거룩했다. 열성 지지자들이 그의 모순을 보지 못한 게 아니라 그 모순마저 사랑해버렸다. 대중들이 집단적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겪은 고난을 이겨내줄 존재로 그를 신념화해 투사(投射)하면서 일어난 현상었다. 그들 사이에서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군주였다. 그가 군주가 되고자 한 게 아니라 지지자들이 저마다 자기 주군으로 삼아버렸던 것이다. 1985년 망명에서 돌아온 김대중이 광주 망월동 5·18 묘역을 찾아가 엎드려 울면서 이를 ‘하해와 같은 사랑’이라고 한 건 그걸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한국사는 신라 이후 고작해야 세 번 정권 교체가 이뤄졌을 뿐이다. 왕씨의 고려 개창, 이씨의 조선 건국, 일제 강점에 이은 대한민국이란 공화정 수립이 전부였다. 실로 한반도에서는 혁명이 없었다. 지속적으로 봉기를 조직하고 싸울 수 있는 배후나 기지가 없었고 외세의 영향이 강한 점, 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이념적 장악력이 높은 통치계급의 변동이 미미했던 점 등이 주요한 이유라고 해도 잘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 권력 교체는 기본적으로 지배집단 내의 변동이었다고 봐도 어긋나지 않는다. 요컨대 평민이 중심이 된 변화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선출직 임기제 ‘왕’이랄 수 있는 역대 대통령들의 특성에서 평민성이나 민주성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이승만은 정치와 언행과 사람을 대하고 부리는 것 등으로 봐 공화제를 형태로 갖춘 봉건적 왕에 가까웠다. 스스로 즐겨 말했듯, 그 자신 왕족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정치를 했다기보다 총통적 방식으로 권한을 집행했다고 하는 게 타당할 게다. 전두환은 민주주의는커녕 ‘대화와 소통’이란 점에서 보자면 끝내 정치인이 아니었다. 김영삼은 그 둥지 안에 민주주의의 알을 낳고자 했지만 성공작은 못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김대중이야말로 한국 역사상 진정한 의미에서 네 번째 권력 교체를 이뤄낸 사람이다. 배경이나 지지자로 봐 평민으로 처음 ‘왕’이 된 자였던 것이다. 근래 일단의 부류들이 건국절 운운하고 있는데 굳이 말하자면 그의 집권으로 한국사는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건국절 논란은 기본적으로 비뚤어진 정치관이 낳은 비정상적 현상이다.

그가 쓰러진 자리에서 승리를 일궜듯

김대중은 시대의 고난을 대중과 역사의 근육으로 바꿔낸 연금술사였다. 그는 모든 패배를 궁극적으로 승리로 바꿔냈다. 그는 먼저 왔고, 먼저 갔다. 오래도록 그를 지지해온 사람들은 이제야 ‘늙은 고아’가 되었다. 그가 남기고 간 민주·통일·평화의 유산을 온전히 계승하려면 스스로 아버지가 되고, 스승이 되고, 군주가 되는 길을 열어가야 한다. 그가 쓰러진 자리에서 마침내 승리를 일궈냈듯.

서해성 소설가·한신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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