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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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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훼손 검열 매뉴얼

등록 2009-06-25 10:52 수정 2020-05-03 04:25

한 기자가 이렇게 쓴다.
“보유한 정보의 양과 질에서 한 나라의 중앙정부 부처와 한 언론사의 일개 프로그램 제작진 중 누가 우월할까? 이 프로그램이 잘못된 내용으로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면, 주무부처 장관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정부가 지닌 풍부한 정보와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조목조목 반박하고 국민을 미망에서 구출해야 할 것이다. 그러는 대신 ‘나 명예훼손 당했어요’라며 검찰에 날름 고소하고는 그 뒤로 숨어버리는 장관을 어떤 국민이 믿고 나라 일을 맡길 것인가. 국민을 설득할 만큼의 콘텐츠도 없고 정책 논리도 없는 사람을 장관 자리에 앉힌 대통령을 어떤 국민이 믿고 따를 것인가. 광우병 소가 웃을 일 아닌가.”
기자는 글을 써놓고 머뭇거린다. 검찰이 새로 개발한 ‘명예훼손 검열 매뉴얼’에 따라 자기검열을 한다.
“우선, 사실 왜곡이 있나 따져봐야지. (다시 한번 읽어보고) 음~ 없는 것 같은데, 혹시라도 내 생각을 오역한 게 있으면 어쩌지? (두근두근) 다음으로, 악의적이거나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보도인지 따져봐야지. 특히 모멸적 표현을 조심해야 해. ‘날름’ 같은 표현? ‘광우병 소가 웃을 일’ 같은 표현? 세 번째로는, 누군가에게 업무방해가 되지 않을지 점검해야지. ‘광우병 소’ 운운했으니 역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업체에 누가 되나? 해당 프로그램 제작진의 정보력이 정부보다 뒤처진다고 했으니, 그 방송사에 대한 업무방해?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 전자우편. 혹시라도 정부에 대한 적개심 어쩌고저쩌고한 전자우편을 누구에겐가 보낸 적이 있었나? 국민의 뜻을 무시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그에 대해 적개심을 품지 않는 언론인이 언론인이랴마는, 어쨌든 검찰의 잣대라니….”
기자는 자기검열을 하다 보니 적개심이 솟는다. 그래서 애초 쓴 글에 덧붙인다.
“검찰의 논리대로라면, 평소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사에 속한 언론인은 정부 비판 글을 쓸 수 없다. 사소한 실수라도 하면 ‘평소 이 언론의 논조가 정부에 적대적이었으므로 이건 의도된 실수’라며 ‘악의성이 입증됐다’고 떠벌릴 게 아닌가. 그래서 평소 정부에 비판적이지 않은 언론인만 정부 비판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정부의 공인을 받은 정부 비판. 광우병 소가 또한 웃을 일 아닌가.”
기자는 다시 머뭇거린다. 2차 자기검열이 시작된다.
“이렇게 쓰면 검찰에 대한 명예훼손이 아닐까? 사실 왜곡은? 모멸적 표현은? 업무방해는? 방금 적개심을 품었는데, 적개심은?”
기자는 자기검열을 하다 보니 열이 뻗친다. 저도 모르게 막말을 덧붙인다.
“이런 ㅆ#(%(*&·$%_*@ㅏJ#(*&(&%!”
이 부분은 편집장이 “우리라도 품격을 지키자. 아이들 보기 부끄러운 세상 아니냐”며 살짝 지운다.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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