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P의 항변

등록 2009-04-22 17:35 수정 2020-05-03 04:25

기자 P는 ‘펜 생활’ 15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종종 질문을 받는다. “사법고시는 왜 안 봤어?” 그러면 P는 대답한다.
P가 법대를 다니던 시절, 그러니까 1980년대에는 교과서에 나오는 법과 현실의 법이 너무나 달랐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은 현실에서 민주공화국이 아니었다. 헌법 제1조부터 거짓말이었으니, 법에 실망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P의 첫 번째 대답이다. 그러나 어디서 들어본 듯한 말이다. 왠지 도식적이다. 그렇게 물으면, P는 또 대답한다.
졸업 뒤에도 기회는 있었다. 90년대, 사법시험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고시촌으로 스며드는 이들이 급증했다. 그러나 당시 법조담당 기자였던 P는 법에 대한 실망을 넘어 법조인에 대한 실망에 빠져들고 있었다. 법정에서 피고인에게 반말을 지껄여대는 판사들, 시국사건 재판에선 온순한 양이 되어 검찰의 논리를 답습하는 판사들, 늘상 재판 기록에만 파묻혀 ‘저러고도 창조적인 사고가 가능할까’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판사들…. 피의자를 쥐어패는 검사들, 그러면서 상관에게는 그렇게 깍듯할 수 없는 검사들, 비리의 몸통엔 약하고 깃털엔 강한 검사들, 사법 정의보다 주제넘은 ‘나라 걱정’에 여념 없는 검사들…. 영화에서 본 멋진 변론 대신 주눅 든 자세로 재판장에게 선처만 호소하는 변호사들, 사건을 더 수임하느라 브로커를 동원하는 변호사들, 전관예우로 돈을 긁어모으면서도 한 점 부끄럼 없는 변호사들…. 나름대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고 자부하던 P로서는 법조계의 어떤 직업에도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두 번째 대답이다. 이해는 간다. 그러나 의구심이 말끔히 가시지는 않는다. 지금이야 설마 그런 판사·검사·변호사들이 있으려고…. 정말 후회한 적 없니? 그러면 P는 대답한다.
가끔은 후회한다고. 촛불집회와 관련해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하는 집시법에 대한 위헌제청을 하는 판사들을 보며(기자로서 야간 집회 금지를 비판하는 기사를 아무리 써도 이 정도의 반향을 불러오지는 못했다), 국방부의 불온도서 지정에 대해 헌법소원을 내는 군법무관들을 보며(이 사실을 처음 보도한 기자는 특종의 영예를 안았다), 우리 사회의 온갖 궂은일에 손길을 뻗치는 공익 변호사들을 보며(언론 보도는 상당 부분 이들에게 기댄다), 후회를 한 게 사실이다. 대개 ‘행위자’가 아니라 ‘전달자’여야 하는 운명이 성에 안 찼다는 얘기다.
그러나 P는 곧 항변한다. 법조계 대부분은 여전하지 않으냐고. 최근의 박연차 사건 수사만 보더라도 검찰은 죽은 권력에 강하고 살아 있는 권력에 비실대지 않냐고.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 재판 개입 사건만 보더라도 법원은 여전히 정치적이지 않으냐고. 권력에 굴종하고 그러면서 권력을 지향하는 게 법조인의 DNA같다고. 권력으로부터 시민의 권리를 지켜주는 게 본래 법률가의 몫이건만, 이 정부 들어 검찰·법원에 부쩍 과거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바람에 그런 기대는 지레 접었다고 P는 정색하며 말한다.
무엇보다 신영철 대법관 사례가 P의 후회를 가로막는 결정적 계기가 된 듯하다. 대법관이란 사람이 저 모양이라면, 누가 뭐래도 법조계의 최정점이자 법률가적 자존심의 화신이 돼야 할 대법관이 저 모양이라면, 이 땅의 모든 법조인이 법조인임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게 P의 생각이다. 그렇게 부끄러워해야 할 위치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를 마음껏 비난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게 다행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아 참, 지난해 촛불집회 때 그렇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외쳤건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민주공화국이 아닌 것 같다는 말도 덧붙인다. 첫 답변으로의 회귀.
아무튼 지금이 행복한 P는 이 순간에도 법조계의 권력 지향자 또는 권력 굴종자들을 한껏 조롱하는 칼럼을 쓰는 중이다. 그러니 더 이상 그에게 “사법고시는 왜 안 봤어?” 같은 질문은 하지 마시라.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