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0월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의 주가가 폭락하면서 시작된 대공황은 세계 곳곳으로 여파를 미치면서 1939년까지 이어졌다. 경제가 마비되고 기업 도산이 속출해 실업자가 전체 미국 노동자의 약 30%에 이를 정도였다. 찰리 채플린은 그 참상을 슬픈 웃음 속에 담아냈지만, 도탄의 현실을 좀더 이지적으로 꿰뚫어보고 그 속에서 사금 같은 인간 삶의 본질 하나를 건져낸 것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
힘겹게 공황을 벗어난 그는 1941년 ‘네 가지 자유’를 천명한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특히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4년 연두교서에서 궁핍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명확히 깨닫게 됐다. 진정한 개인의 자유는 경제적 보장과 독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빈곤한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다’(Necessitous men are not free men).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독재의 자양분이 된다. 우리 시대에 이런 경제적 진실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우리는 말하자면 두 번째 권리장전을 받아들이게 된 셈이다. 그 아래에서 우리 모두- 신분이나 인종, 신조와 관계없이- 를 위한 사회보장과 번영의 새로운 기초가 다져질 수 있다. 이 권리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어 그가 나열한 ‘권리’들이다. △유용하고 보수도 적절한 직업을 가질 권리 △적절한 음식과 의류, 여가생활에 충분한 돈을 벌 권리 △농민들이 작물을 기르고 팔아 남부럽지 않은 가족 생계를 꾸릴 권리 △크고 작은 사업자들이 국내외에서 독점기업의 부당 경쟁이나 지배에서 벗어나 거래를 할 권리 △모든 가족이 남부럽지 않은 집을 가질 권리 △적절한 의료 보호와 건강을 누릴 권리 △노후, 병, 사고, 실업 등의 경제적 공포로부터 적절히 보호받을 권리 △좋은 교육을 받을 권리….
대공황기를 겪으면서 지지를 얻게 된 이런 권리 목록은 이후 세계인권선언을 기초하는 데 영향을 미쳤고, 지금은 ‘경제적·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규약’(A규약·1966)으로 집대성됐다. 고문을 당하지 않을 권리, 영장 없이 체포당하지 않을 권리와 마찬가지로 ‘남부럽지 않은’ 삶의 기초 조건을 누리는 일 또한 국제사회에서 권리로 인정된 것이다.
그 ‘남부럽지 않은’ 또는 ‘적절한’ 정도가 어디까지인지는 각 나라마다 처한 조건에 따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까다로운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대부분의 국가가 립서비스 말고는 경제적·사회적 권리를 ‘권리’로 받아들이기조차 꺼린다는 데 있다. 정부는 그 권리의 보호선을 그어보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고, 또 그 권리를 침해당한 이들도 정치적 자유를 침해당한 이들처럼 저항하지 않는다. 경제는 냉엄한 시장의 논리에 따라 돌아가야 하고, 인위적인 부의 재분배는 자선의 영역일 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제 대공황이라는 말이 다시 들린다. 미국인의 23%가 “미국 경제는 공황 상태”라고 응답한 설문조사 결과가 전해진다. 우리나라 경제도 미국발 금융위기의 짙은 그림자 속을 헤매고 있다. 그러면서도 냉혈동물 같은 자본의 본능에 더 많은 재량권을 넘기려 하고 있다. 탐욕이 낳은 위기의 끝자락에서 다시 무수한 비참이 거리를 메우는 사태를 봐야만 우리는 다시 저 권리의 목록들을 떠올릴까. 인간의 체온으로 자본주의를 덥혀 ‘자유인’들의 사회를 부르는 지도자가 미리 나타날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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