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용현 한겨레21 편집장 piao@hani.co.kr
이배영이란 선수 참 멋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베이징올림픽 최고의 감동이었다. 넘어져서도 바벨을 놓지 않던 투혼 때문이 아니다. 미소 때문이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때 그의 경기 장면을 지켜보지 못한 덕분에 이배영의 ‘살인 미소’는 더 신선하고 환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다리에 쥐가 나는 불운으로, 눈앞에까지 왔던 금메달을 놓친 것은 물론 실격까지 당한 선수가 주먹으로 바닥을 한 번 치고 머리카락을 붙들며 소리 한 번 지르고는 끝이었다. 경기장을 떠나며 살짝 미소까지 보였다. 쥐가 난 다리를 바늘로 찌르고 다시 경기장에 나설 때도 스스로 손을 들어 박수를 치며 웃어 보였던 그다. 은메달을 따고도 우는 선수들이 많았는데, 생애 마지막 올림픽에서 실격당한 선수의 저 무념무상한 표정이라니!
이제는 금메달 강박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쯤 상식이 됐다. 은메달, 동메달 또한 장하다고들 말한다. 실격하고도 웃음짓는 훈남 선수에게 금메달리스트 못지않은 박수를 보내고 있다.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한다. 선진화한 대한민국이다.
하지만 스포츠를 떠나 일상으로 돌아와보면, 2등은 여전히 비참하다. 실격은 죽음이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보자. 노동자 파견업체를 통해 일자리를 얻어야 했던 비정규직은 2등 시민이다. 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은 월급을 받고 일했다. 두 달여 만에 해고됐다. 그것도 문자 메시지로 온 해고 통보. 이후 법도, 정부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 단지 일자리를 되찾기 위해 시작한 투쟁은 1천 일을 벌써 넘겼고 단식은 70일이 가까워지고 있다. 소금과 효소마저 먹지 않고 죽음이 보이는 단식을 벌이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투혼을 기리는 이들도 없다. 그들에게 멋있는 웃음을 지어보라고 할 텐가. 비정규직이라는 2등 시민의 굴레, 혹은 실격자의 멍에를 쓰고 살아가는 이들이 800만 명이 넘는다.
친구들을 제치고 이른바 ‘좋은 대학’에 들어간 아이들은 우리 사회의 금메달리스트들이다. 그리고 수많은 은메달리스트와 실격자들이 남는다. 아이들은 특목고니 자사고니 하는 ‘좋은 고등학교’에도 들어가야 한다. 급기야 국제중 같은 ‘좋은 중학교’도 생기니, 초등학생들도 경쟁의 트랙에서 본격적으로 출발 자세를 취해야 한다. 1등과 2등이 갈리고, 실격의 아픔을 겪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정정당당하게 최선을 다했으면 돼. 졌더라도 자신 있게 웃어보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다음 계단에서 아이들은 저 비정규직의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정정당당한 경쟁을 한 것도 아니다. 정직한 땀만으로 겨루는 경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조건에서 경쟁을 시키면서 결과는 똑같은 자로 재고 있으니, 출발선이 다른 육상이요 체급을 무시한 레슬링이다.
비록 1등을 하지 못해도, 노력했으나 뒤처지더라도 얼마든지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우리는 은메달을 목에 걸고도 감격할 수 있고 실격을 당하더라도 웃을 수 있다. 1등에게 기꺼이 찬사를 보낼 수 있다. 프랑스와 한국 사회에서 살아본 경험을 바탕으로 을 쓴 목수정씨는 그럴 수 없는 이유를 말한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게 만드는 한국 사회의 구조가 절망이다. 곁눈질하면 금세 낙오자가 돼버린다. 국가라는 게 있다면 적어도 밥 먹고 자는 정도는 받쳐줘야 한다는 것을 점점 잊어버린다.” 그의 프랑스인 연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한국 사회는 미스터리하다. 삶의 조건은 비명을 지를 만큼 힘들다. 폐지를 주우며 살아가는 할머니들이 많을 정도로, 어떤 사회적 안전망도 없다. 다들 자살하기 일보 직전 같은데, 왜 그렇게 밝고 친절한지 모르겠다.”
정말 모를 일이다. 대한민국을 무대로 매일같이 펼쳐지는 이 정글 올림픽에서 선수들은 왜 그렇게 밝고 친절한지, 왜 애써 자신의 훈련 부족만 탓하고 있는지. 이 올림픽은 애초부터 정정당당하고 인간적인 스포츠가 아닌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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