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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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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진실

등록 2008-07-29 00:00 수정 2020-05-03 04:25

▣ 박용현 한겨레21 편집장 piao@hani.co.kr

할머니의 부음을 받고 기차표를 끊었다. 술·담배를 하시면서도 백수에 가까운 생을 누린 건 시골에 사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쇠락의 길을 걷는 그곳이 할머니께는 생명의 보급로였던가 보다. 하긴, 공기 맑은 활골의 겨울은 투명하고, 슬픔의 빛깔도 새하얀 색이었다.
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나오자, 마당 한가운데에 쌓은 연탄 무더기가 활활 타오르고 굵은 눈송이들이 불길 속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강소주에 취한 동네 어른들은 호상이라며 몽롱한 눈빛으로 덕담을 나누다가 이내 분절음이 되지 않는 푸념과 시비로 흐느적거렸다. 손톱이 닳고 피부가 뻣뻣해진 뭉툭한 손마다 소주를 담은 컵이 들려 있었고, 연탄불 옆에는 갓 잡아 통째로 삶아놓은 돼지 한 마리가 주검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고기맛이 달콤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눈송이들 사이로 눈빛 하나가 반짝했다. 힐끗 쳐다보고는 줄행랑을 치는 꼬마. 외투도 걸치지 않고 목덜미가 훤히 드러난 꼬마는 추워 보였다. 떠들썩한 마당이 즐거운 듯 뱅뱅 맴돌며 수줍게 뛰어다니는 아이들. 어린 시절, 방학이면 이곳에 와서 덜 익은 호두를 따 껍질을 돌에 갈아 벗기고 연둣빛 쌉쌀한 알맹이를 꺼내 먹던 기억을 떠올렸다. 구운 메뚜기를 먹어볼 때는 낯선 음식의 맛보다 메뚜기를 집어 건네는 검고 뭉툭한 손과 닳아버린 손톱들이 더 호기심을 건드렸다.
그렇잖아도 궁벽한 마을인데다 시간이 갈수록 빈집이 늘고, 자라난 아이들은 떠나갔다. ‘활골’이란 옛 이름은 발음이 집 앞 개울물 소리처럼 막힘 없이 흘러 좋은데, 궁촌(弓村)으로 굳어진 행정구역명은 왠지 궁촌(窮村)을 떠오르게 했다. 늘 빚에 쪼들리고 술로 상한 속을 달래고 그러다 싸움이 붙는 어른들의 마을이 어린 마음엔 점점 싫어져갔다.
하얀 꽃으로 생전보다 예쁘게 단장한 할머니의 상여가 뒷산으로 오르던 날, 아이들은 저만치 앞질러 논두렁을 내달렸다. 바람은 찼고 목덜미가 드러난 꼬마는 추워 보였다. 그래도 온정 넘치던 대한민국 평균의 마을에서 대부분 삶을 보내고, 쇠락해가는 후손의 굳은 뼈마디를 바라보며 슬프게 눈을 감으셨을 할머니. 그렇게 한 시대가 묘지에 묻히는데, 지관이 가리켜주는 관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봉분을 다지는 산역꾼들의 덜구 소리가 산 밑으로 퍼질 때, 아이들은 눈 쌓인 산길을 또 달음질쳤다.
그날 꼬마의 집에 갔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 방엔 앉은뱅이 책상이 하나 있었고 그 위엔 흔한 참고서나 동화책 하나 꽂혀 있지 않았다.
몇 해 뒤, 도회지 중학교로 진학한 꼬마는 할머니와 함께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는 짤막한 소식을 들었다.

15년도 더 된 기억이 아직은 생생하다. ‘2008년 여름 농촌 절망 보고서’를 표지이야기로 내놓으면서 스스로 절망하게 되는 건 그 기억이 그대로 지금의 현실인 탓이다. 농촌 마을을 찾아 3박4일 동안 일하며 취재한 6명의 기자·PD들은 “예전처럼 한가한 시선으로 목가적인 농촌 풍경을 바라볼 수 없게 됐다”고 한다. 오래된 진실이다.

박승화 기자, 구둘래 기자, 전종휘 기자, 이순혁 기자, 박수진 취재영상팀 PD, 남형석 인턴기자, 모두 수고했습니다. 취재에 협조해주신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구교4리 주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힘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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