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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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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이기기 시작했다

등록 2008-07-11 00:00 수정 2020-05-03 04:25

▣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두 달 넘게 계속되는 촛불 정국의 승패가 드디어 보인다. 촛불이 이기기 시작했다.
정부가 고시 게재를 강행한 것은 대단한 승부수였다. 그 이전엔 물대포와 방패와 함께 대통령 담화라든가 ‘추가 협상’ 진행과 같은 카드로서 강온 전략을 모두 쓸 수 있었지만, 이제는 촛불을 법질서를 어지럽히는 불순 세력으로 몰아 강경 진압으로 때려잡는 것 말고는 정책 옵션이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6월28일과 29일에 걸친 폭력적인 초강경 진압과, 한나라당 및 관변 매체를 앞세운 촛불의 불순성에 대한 총공세, 그리고 참여연대와 진보연대에 대한 압수수색 등으로 이를 실천에 옮겼다. 폭력 진압 시비도 개의치 않으며, 그 결과 시위대가 과격화된다면 정부로선 그야말로 작전 성공이다. 급변한 상황에 움찔한 거리의 시민들은 여기에 휘말리는 듯한 모습도 보였고, 결국 촛불은 짓밟혀 꺼질 것인가 아니면 ‘다른 불’로 변할 것인가라는 선택만 남은 듯했다.

신부님들의 ‘오프사이드 트랩’

그런데 여기에서 ‘정의의 사나이’ 가톨릭 사제님들과 뒤이은 목사님, 스님들의 물결이 엉뚱하게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이들은 자칫 벌어질 뻔한 개싸움에서 촛불을 가볍게 들어올려, 귀를 틀어막은 청와대 방면을 가볍게 무시하고 비폭력과 진심과 소망이라는 촛불의 출발점에 내려놓은 것이다. 이제 정부는 어떤 전략을 쓸 수 있을까. ‘추가 협상’ 시늉이나 ‘겸허한 반성’의 제스처 등의 카드는 이제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백합꽃을 든 수녀님과 십자가를 든 목사님, 목탁을 든 스님들에게 최루액을 뿜고 곤봉 찜질을 내릴 것인가. 그러고 나면 그 뒤로 몇만, 몇십만을 헤아리며 다시 모여드는 촛불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난데없는 신부님들의 ‘오프사이드 트랩’에 걸려 졸지에 전략이 동이 나버린 정부와 지배 세력은 볼품없는 대응만을 줄줄이 토해내고 있으며, 그 몰골은 시간이 갈수록 급속도로 뭉그러져 고개를 돌리고 싶을 지경이다. 문화방송 〈PD수첩〉이 영어를 제대로 번역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5명의 검사가 투입된다(삼성 특검은 검사 1명(!)과 3명의 검사보로 이루어졌었다).

진보신당이라는 공당에 언감생심 이승만 정권 때에나 있었다던 백색 테러가 저질러졌다. 검찰은 이번에는 정운천 장관의 ‘옥체’를 건드려 옷을 찢은 이들을 검거하겠다고 나섰고, 관제 신문들은 구속된 대책위 활동가의 문서에서 ‘공화국’이라는 단어가 발견되자 이를 대서특필하면서 이것이야말로 ‘북조선인민공화국’과의 연계를 암시한다고 일제히 합창한다.

드디어 전가의 보도 ‘경제 위기론’까지 나왔다. 자신들이 한껏 흔들어대던 ‘747 경제’의 풍선을 슬그머니 내리면서 그 책임을 모두 촛불에 있다고 강변하는 것이다. 경제신문들은 갑자기 ‘정치 신문’으로 변해 아무런 데이터나 증거도 들지 않고 ‘촛불시위로 경제성장에 타격이 온다’는 정치 선동을 매일 내놓고 있으며, 기획재정부 장관과 국무총리는 촛불로 인해 외국 투자와 관광객이 줄어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막상 데이터를 보니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했을 때 외국 투자는 2/4분기에 3.5%, 5월의 관광객은 무려 8.4%나 증가했다고 한다. 되레 촛불이 살린 경제를 정부가 망쳐놓았다는 소리가 나올 지경이다. 실로 낯이 화끈거린다.

촛불이 이겼다. 5월부터 매일 밝혀진 촛불은 ‘골프장 벼락’이라는 요설에 속지 않았고, ‘추가 협상’이라는 눈속임에 흐려지지 않았고, 장마철 폭우에 젖어 꺼지지 않았고, 물대포와 곤봉에 기죽지 않았고, 노골적인 폭력 유발의 유혹에서 스스로를 추하게 만들지 않았고, 출구도 보이지 않는 지루한 시간의 시험 속에서 경찰이 지치고 기자들이 지치고 정치인들까지 지쳐 나가는 가운데 생생하게 살아, 되레 아침 이슬 얹힌 백합 꽃잎처럼 처음 그대로의 평화와 기쁨을 가득 머금은 채 더 크게 살아나 서울광장에 피어났다. 그 가운데에 몇 번씩 고시 게재 강행을 좌절시켰고, 내용 없는 온건 유화책을 면박 주었으며, 물대포와 곤봉까지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이기고 있다. 촛불은 이제 청와대를 버리고 서울 곳곳에서, 지방 곳곳에서 밝혀지고 있다. 달랠 수도 어를 수도 없는 이 촛불은 시간이 지나도 꿋꿋하게 더 풍성하게 자라날 것이 확실하다. 촛불 피로증이니 이번주가 고비이니 하는 말들을 촛불이 가볍게 따돌린 것이 벌써 몇 번째인가. 이와 더불어 당황한 정부와 지배 세력이 온갖 악수를 이어서 둘 것 또한 확실하다. 두 달 동안 팽팽한 평행선을 달려온 듯했던 두 힘 사이의 균형이 무너졌다. 앞으로 이어지는 악수의 몰락과 촛불의 상승은 더욱 명확히 대조되는 쌍곡선을 그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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