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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안룰렛’과 쇠고기 파티

등록 2008-05-15 00:00 수정 2020-05-03 04:25

▣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육혈포’(六穴包)라고도 한다. 매그넘 권총에는 6개의 총알이 들어가는 구멍이 있다. 거기에 탄알 1발을 넣은 뒤 리볼버 탄창을 빙그르르 돌려서 채워넣고 자기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6분의 5의 확률을 빌려 결과가 ‘틱’ 하는 싱거운 금속성으로 끝나게 되면 거액의 돈을 얻게 된다. 하지만 재수가 옴붙고 6분의 1의 확률이 발동되어 그 결과가 “BANG!”이 되면 머리에는 구멍이 숭 뚫리게 되고 거기로 피와 뇌수를 한 바가지 쏟으며 픽 쓰러진다. 이름하여 ‘러시안룰렛’이다. 끔찍하지만, 판돈으로 걸 것이라고는 목숨밖에 없는 막바지 인생의 페이소스가 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확률? 위정자의 입에서 나올 소린가

인간 광우병의 위험이 큰 미국 쇠고기 수입을 옹호하려는 논리 중에 “발병 확률이 극히 적다”는 것이 있다. 그럴 법도 하다. 어차피 인간 광우병에 대해 현재 축적된 과학적 지식은 극히 미미하며, 따라서 ‘안전하다’는 쪽이건 ‘위험하다’는 쪽이건 논란의 여지없이 상대방 입을 막을 수 있는 논리는 애초에 나올 수가 없다. 그러니 여기에서 굳이 미국제 쇠고기를 먹(이)고야 말겠다는 이들이 최종적으로 이 ‘확률’의 논리에 기대게 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한 번은 죽는 목숨, 교통사고이든 암이든 죽을 기회는 사방에 깔려 있다. 그러니 그보다 훨씬 낮은 확률의 위험에 벌벌 떨면서 어찌 삶을 산다고 할 것인가라는 얼핏 비장한 생사관까지 비쳐 나온다.

4500만의 한국인은 밥상에서건 화장대에서건 심지어 생리대로건 각자 하루에 최소 두 번씩은 광우병 물질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모두가 ‘독립된 사건’들이니, 결국 줄잡아 하루에 1억 번, 1년이면 365억 번, 10년이면 3650억 번 러시안룰렛의 방아쇠가 당겨지는 것이다. 발병 확률이 10억분의 1이라고 하는가? 10년 뒤 우리는 365명의 이웃들이 머리에 스펀지처럼 구멍 숭숭 뚫린 채 픽 쓰러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인가. ‘골프장에서 벼락 맞아 죽을 확률’이라고 하는가? 4500만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박이 치나 매일 하루에 두 번씩 골프장에 나가면서 10년을 보낸다고 하자. 어찌 벼락 맞아 죽는 이가 나오지 않겠는가. 벼락은 그럼 무엇을 때리란 말인가. 머리가 터진다. 또 픽 쓰러진다.

이 잔인한 게임은 사람의 목숨을 판돈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러시안룰렛과 동일하다. 승률이 6분의 5보다 훨씬 높으니 억지라고? 승자들이 얻게 되는 대가가 무엇인가. 러시안룰렛처럼 막장 인생을 한 번에 뒤집을 만한 거액의 돈인가. 기껏해야 ‘값싸고 질 좋은 쇠고기’를 그것도 자기 돈 내고서 게걸스레 실컷 먹는 것이 아닌가. 도박은 승률과 판돈과 기댓값을 모두 감안해 평가한다. 아무리 봐도 광우병 쇠고기 수입과 러시안룰렛은 꼭 닮은꼴이다.

분노를 넘어 오심(惡心)이 일어난다. ‘확률’이라고? 국민의 건강이 러시안룰렛인가? ‘머릿수’로 몇 명 안 되니 재수 없는 자들은 머리에 구멍 뚫린 채 픽 쓰러져 죽으라 하고 나머지는 쇠고기 파티나 신나게 벌여보자는 게 도무지 위정자, 아니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서 입에 올릴 소리인가.

환경이나 보건처럼 국민의 안전에 치명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국제법적으로 인정되는 ‘사전금지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이라는 것이 있다. 이러한 사안에 관련된 행동들은 그 위험이 비록 100%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고 해도 국가는 그러한 위험을 낳을 수 있는 일체의 행동을 금지시키는 쪽으로 입법과 행정을 해나가야 한다는 원칙이다. 요컨대, “나중에 후회할 짓은 아예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사전금지 원칙’을 아는가

이 원칙이 얼마나 소중한 인류 진화의 산물인지를 이번에 깨달았다. 인간 사회에는 눈앞에 어떤 기회가 보이면- 그것이 거액의 수익이건 아니면 고작 쇠고기 파티이건- 군침을 흘리며 이성을 잃는 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들이 힘없고 운 없는 가엾은 동료 몇몇을 제물로 삼아 사회 전체를 그쪽으로 몰고 가는 원시적 야만성은 언제 어떻게 발동될지 모른다. 이러한 인류의 퇴화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서 국제법에서 일구어낸 문명의 승리가 바로 이 ‘사전금지 원칙’인 셈이다. 제발 근거로 댈 게 기껏 ‘확률’ 밖에 없다면 ‘사전금지 원칙’에 따라 협상을 원점으로 돌려라. 전 국민을 쇠고기에 걸신이 들려 러시안룰렛까지 벌이는 짐승으로 타락시키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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