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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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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행군

등록 2008-05-09 00:00 수정 2020-05-03 04:25

▣ 박용현 한겨레21 편집장 piao@hani.co.kr

침팬지들이 행군한다, 열대 밀림을 헤치고. 라쿠카라차. 보무도 당당하다. 밀림 지역에선 침팬지가 덩치 큰 축에 속한다고 한다. 다른 침팬지 무리의 영역으로 침입해 잠시 숨죽인다. 공격 개시!
열대우림을 다룬 환경 다큐멘터리에 불쑥 끼어든 이 낯선 에피소드는 곧 참혹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싸움에서 승리한 침팬지들은 상대 무리의 새끼 한 마리를 포획한다. 그리고 밀림의 카니발이 시작된다. 여린 새끼의 살점과 내장을 뜯어내 먹어치우는 침팬지들. 무화과 등 먹이 확보를 위해 침공을 감행한 침팬지들은 덤으로 생긴 먹이를 통해 단백질을 보충하는 것이라고 내레이터가 설명했다. 가느다란 생갈비 몇 대를 뜯고 있는 동료에게 신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좀 나눠달라는 시늉을 하는 장면에선 너무나 인간과 닮은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때 대구에서 일어난 초등학생 집단 성폭력 사건을 생각했다.
아이들은 늘 피해자다. 어른들의 전쟁터에서 유탄을 맞아 쓰러진 아이들은 참혹한 모습으로 그 사실을 증언해왔다. 2005년 경기 의왕시에서 보살피는 이 없이 지내다 개에 물려 숨진 아홉 살 영인이부터 납치·살해범에 희생된 무수한 아이들까지….
그러나 이제 아이들은 가해자의 모습으로, 자신이 피해자임을 증언하기에 이르렀다. 대구 사건에서 아이들은 가해자이건 피해자이건 입을 모아 외치는 듯하다. 어른들은 왜 우리가 이런 비극적 장난에 빠지게 놓아두었냐고, 우리의 영혼이 이토록 황폐화되도록 방치했느냐고.
그런데 어린이가 피해자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 쉽게 눈물 흘리고 분노하던 어른들이 이번엔 다른 태도를 취한다. 학대와 방임이라는 어른의 책임보다 다른 문제점(포르노 따위)에 방점을 찍거나 심지어 아이에게도 책임을 물으려 한다. 고작 열두 살, 열세 살인 그들에게.
따지고 보면, 그동안 내비친 어른들의 눈물과 분노도 거짓이었던 것 같다. 변해온 게 없으니 말이다. 아동학대와 방임의 끔찍함을 구조와 제도 차원이 아니라 ‘세상에 이런 일이’ 식으로 다루는 언론매체나, 토론석상에서 고상한 전문용어나 주워섬길 뿐 행동에는 나서지 않는 학자들이나, 예산 타령만 늘어놓는 공무원들이나, 사건이 있을 때만 입바른 소리를 내뱉는 금붕어 기억력의 정치인들이 싫은 이유다. 혹시 ‘내 아이는 저런 비참에서 벗어나 있으니 다행’이라고 여기며 그저 눈물 몇 방울 흘려주거나 끌끌 혀 몇 번 차주는 것으로 끝냈던 것은 아닌가. 희생된 아이들로 안도와 평온의 단백질을 보충하고 만 것은 아닌가.
일자리 창출이 시급하다는데, 전국의 동마다 어린이 보호 전담요원들을 두는 것은 일석이조 아닐까. 대구 사건엔 왜 경찰이 먼저 나서나. 아동심리·상담 전문가로 구성되고 사법경찰권까지 갖는 부드럽고도 강한 전문기관을 만들 수는 없을까. 예산이 없어 난리치는 저소득층 지역 공부방들에 파격적인 지원을 할 수는 없을까. 방과후 아이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잔디 야구장, 축구장 따위를 지어주면 어떨까. 맞벌이 부부를 위해 아이를 시간제로 보살펴주는 공무원을 둘 순 없을까. 데팡쇠르 데 장팡(Defenseur Des Enfants)* 같은 어린이·청소년 인권 옴부즈맨 기구를 만드는 건 어떨까….
그동안 들어온 대운하 건설이나 몇조원의 눈먼 돈 이야기를 떠올리면 꿈같은 일도 아닌데, 어린이를 대신해 나설 사람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영혼 없는 인간이 아니라 소명의식에 불타는 목민관인 복지 공무원들? 학문의 진정성을 의심할 여지 없는 아동복지학자들? 늘 약자의 편에 서왔던 시민단체들? 표가 되는 일인지에 연연하지 않고 공익을 추구하는 정치인들? 이도저도 아니라면 어린이들이 피땀 흘리며 직접 거리를 행진해야 하나?
그러나 어른들은 행군한다, 효율과 경쟁의 밀림을 헤치고. 먹이다툼에 차이는 어린이들. 고작 열두 살, 열세 살, 솜털 보송보송한 아이들의 살갗이 사나운 손톱과 나뭇가지에 찢겨 붉은빛을 내보인다. 승리의 행군은 보무도 당당하다. 라쿠카라차.


*프랑스에서 2000년 3월에 설립된 이 기구는 민간단체지만 정부 지원 아래 불우 어린이·청소년을 위탁·보호하고 학교폭력·체벌·불평등 대우 등을 감시·감독한다. 특히 학대 사례가 신고되면 피해·가해자 등 관련자들을 불러 다양한 의견을 듣고,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를 열어 행정기관에 시정 또는 징계를 요구한다. 위원회 구성에는 청소년 참여가 의무화돼 있다. 유럽 30개 나라에서 이런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 2006년 7월11일치 30면,
www.hani.co.kr/arti/opinion/column/14024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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