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용현 한겨레21 편집장 piao@hani.co.kr
벗이여.
눈을 들어 허공을 보니, 세월은 저 새와 같이 빠르고, 그대의 육신도 어느덧 싯푸른 청춘을 놓아버렸겠네그려.
일찍이 권좌에 눈먼 대머리 장군이 남도 땅을 피로 물들이고 득세한 뒤 1987년 민주와 자유를 위해 수많은 젊음이 떨쳐 일어나 거리로 내달렸을 때, 그 거리 한가운데서 그대는 우뚝 선 소나무 같았지. 불순분자니 불만세력이니 그 어떤 굴레도 두려워 않고 곧은 소리 외치던 이들 수십만, 수백만이었으니, 이 땅은 온통 드넓은 소나무숲이 아니었던가. 괴테가 일렀듯, 모든 이론은 회색이요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인 것을. 그들 가슴에 오롯이 박힌 것은 압제에 고통받고 땀 흘려 일하고도 배고픈 이웃들에게 손 내밀고자 함이었겠지.
그 싸움이 10년 만에 열매를 맺어 거리에 섰던 이들이 새로운 10년을 열었건만, 권좌에 이른 무리는 현실정치가 어떠니 비겁한 이론을 들먹이며 옛 뜻을 굽히곤 했으니.
그들을 탓하려 붓을 든 건 아닐세. 돌이켜보면, 권세를 구하는 욕망이나 공명심이나 영웅심리나 그 어떤 허튼 생각도 없이 거리에 섰던 대부분의 젊음은 그런 무리에 속하지 않은 채 어느새 세인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더란 말이지. 그대처럼 세상을 버리고 정신의 초야에 은둔해버린 이들 말일세.
듣기로는 나랏일을 맡아 하되 그 뜻을 드러내지 않고 사는 이도 많으며, 기업에 들어가거나 창업을 하여 돈 버는 재미에 푹 빠진 이들도 있고, 변호사 같은 전문직이 되어 세상일을 재단하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세상에 입 다문 이들도 있으며, 아예 번잡한 세상과 인연을 끊고 낙향해 난초를 벗 삼는 이도 있다고 하지.
왜 그들은 더 이상 광장에 나서지 않고 그 푸르렀던 위세를 더 이상 떨치지 않는 걸까. 때가 아니면 몸을 숨기라는 옛사람의 말을 따름인가. 아니면 세월의 갈퀴가 그들 가슴에 박혔던 오롯한 마음을 채갔음인가. 어떤 이는 헤겔의 설에 빗대어 말하더군. 시대는 자기에 맞는 인물을 골라 쓰고는 소용이 다된 인물은 가차없이 버리노라고. 그대는 날카롭고 명석함이 그 시대에 맞아 우뚝한 모습이었으나, 이제 다른 시대가 와 그대를 버린 것인가. 하지만 모를 일이네. 시대가 그대를 버렸는지, 그대가 시대를 버렸는지.
때는 다시 공안기구의 정치사찰이 고개를 들고, 옛 거리에서 공포의 대상이던 백골단이 귀환하고, 효율의 이름으로 경제적 약자를 벼랑으로 몰아대는 저 추억의 80년대로 돌아가는 듯한데, 요즘 젊은이들은 그때와 달라 나라와 이웃을 생각하는 뜻이 높지 않다고 하니 그대 생각이 절로 간절해지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 접어뒀던 옛 뜻을 꺼내들고 정신의 초야를 떠나오는 그대 모습을 그리는 것이네.
민주와 진보를 내세운 이들이 낙엽처럼 속절없이 떨어져나간 선거날, 헛헛한 마음에 수신처조차 알 수 없는 편지를 쓰네. 다시 거리에 서지는 않을지라도, 젊은 날 그려봤던 세상을 위해 서로 어깨 겯고 싶어서일세. 내 아파트값 오른다는 말에 앞뒤 가릴 것 없이 토건국가 선발대에 표를 던지는 세태 속에, 아이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아들딸 손 잡고 대운하 반대 행진에 나서는 에코파파들도 있다 하니, 그 옛날처럼 절망은 희망을 이기지 못할 듯싶으이.
벗이여.
그대는 우뚝한 소나무였고, 저 소나무는 백년이나 푸르름을 놓아버리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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