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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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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범의 질문

등록 2008-04-11 00:00 수정 2020-05-03 04:25

▣ 박용현 한겨레21 편집장 piao@hani.co.kr

어린이 납치 용의자가 붙잡혔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 있지 않았다. 아이의 위치를 추궁하는 경찰에게 용의자는 변호사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는 변호사에게 아이의 몸값을 받으면 수임료를 주겠다고 했다. 변호사는 수임을 거부했다. 이번엔 용의자가 아이의 부모를 찾았다. 몸값 대신 변호사 수임료와 보석금을 현금으로 달라고 요구했다. 실랑이로 시간이 흐른 뒤, 용의자는 아이를 산 채로 상자에 넣어 묻어둔 장소를 실토했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아이는 생존의 몸부림 끝에 질식해 숨져 있었다.
아이가 처한 상황을 미리 알았다면, 경찰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고 뭐고 따질 것 없이 범인의 얼굴부터 후려쳐야 했을까. 그래도 불지 않는다면 그의 손톱 밑에 바늘이라도 찔러넣어야 했을까. 1980년대 초 미국 뉴욕주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재깍거리는 시한폭탄 가설’(ticking time bomb scenario)의 한 실례로 인용되곤 한다.
서울의 한 다중밀집 장소에 시한폭탄이 설치돼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이 유력한 테러 용의자를 체포한다. 첩보에 따르면, 폭탄이 터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30여 분. 용의자는 완강히 진술을 거부한다. 폭탄이 터지면 수백~수천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게 된다. 재깍재깍. 시간은 이제 15분 남았다. 우리는 저 가증스런 테러리스트의 머리를 욕조물에 밀어넣어야 할까.
이 가설은 고문 금지라는, 헌법과 인권의 대원칙에 선명한 균열을 낼 수도 있는 유혹이다. 내 딸의 목숨이, 수천 명의 무고한 시민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한갓 종이 위의 잉크 자국인 헌법 조항이 무슨 대수며 짐승만도 못한 자의 인권이 무슨 가치란 말이냐.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인 앨런 더쇼위츠 같은 이는 아예 ‘고문영장’ 제도를 만들어 이럴 때 합법적으로 고문을 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 테러 용의자는 고문에 즉각 입을 열까? 1995년 필리핀 경찰은 여객기 10여 대를 폭파하려던 테러 계획을 막아냈는데, 유용한 정보는 대부분 범인의 노트북에서 찾아냈다. 이후 67일 동안 계속된 구타와 담뱃불로 성기 지지기 등의 고문으로 얻어낸 것은, 경찰이 상상력을 동원해 ‘너 이렇게 하려고 했지?’라고 물어본 질문들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자백들뿐이었다. 더구나 테러 용의자가 경찰을 혼란시키려 거짓 사실을 슬쩍슬쩍 흘린다면? 그러는 사이, 남은 15분이 모두 지난다면? 만에 하나, 고문당한 용의자가 무고한 시민이었다면?
이런 의문들 속에 이스라엘 대법원은 이런 답을 내놨다. 이스라엘 국가안보원(GSS)의 테러리스트 고문 관행에 대한 1999년 판결이다. “건국 이래 이스라엘 파괴를 목적으로 자행되는 온갖 테러로, 공공장소, 대중교통, 도심 광장, 극장, 커피숍 등에서 수십 명씩 목숨을 잃고 있다. 테러분자들은 어린이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막기 위해 어떤 수단이든 다 동원할 수는 없다는 게 민주사회의 숙명이다. 민주사회는 한 손을 뒤로 묶인 채 적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에겐 나머지 한 손이 있지 않은가. 법의 지배와 개인의 권리 인정은 안보를 다루는 데서도 불가결한 요소다. 그것이 마침내는 우리 사회의 정신과 힘을 강화할 것이며 우리가 직면한 문제도 극복하게 할 것이다.”
시나리오는 시나리오를 낳는다. 저 어린이 납치 용의자가 끝내 입을 다물고 있을 때, 경찰은 그에게 어린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딸을 취조실로 데려온다. 용의자는 딸을 사랑한다. 고문하는 대신, 딸에게 위해를 가하겠다고 협박한다면? 그래도 자백을 하지 않는다면? 그럼, 남은 방법은? 잔혹한 가정의 연속….
어린이 납치·살해 사건이 잇따르면서 피의자 인권을 부정하는 주장이 스멀스멀 번져나온다. 더 이상 용의자의 얼굴을 가려주지 말자는 주장부터 모든 가능한 수단으로 범죄자를 처벌·감시하자는 아우성 속에, 10년 동안 정지된 사형집행의 부활을 불러내려 주문을 외는 이들도 있다. 법의 지배와 인권은 위축돼가고 있다. 문제는 중요한 원칙이 한번 기울기 시작하면 가속도가 붙는다는 점이다. 그 쏠림 현상 속에 한 사회의 정신과 힘도 길을 잃는다는 점이다.
인권이고 뭐고 따질 것 없이 누군가를 고문하고 극형에 처하고 짐승처럼 감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할 때, 자라나는 아이들은 증오하는 법부터 배우게 된다. 반대로 취약층 아이들을 사회가 돌봐주고, 어린이를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며, 성범죄자의 인권마저 인정하면서 대책을 세우자는 흐름이 대세를 이룰 때, 아이들은 증오 대신 용기를 배우게 된다. 굳이, 훗날 또 다른 흉악범이 되어 돌아올 가능성이 큰 아이는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알프레드 매코이 미 위스콘신매디슨대 역사학 교수와 스티븐 그리핀 툴레인대 로스쿨 교수의 글을 참조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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