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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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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지통

등록 2008-04-04 00:00 수정 2020-05-03 04:25

▣ 박용현 한겨레21 편집장 piao@hani.co.kr

환각지(幻覺肢): 외상이나 수술로 팔다리를 잃어도 뇌에는 그에 관한 기능이 상당 부분 남아 있어, 감각상으로는 상실된 팔다리가 움직이는 것으로 느끼는 현상. 환지통(幻肢痛)이라 하여 상실된 팔다리 부위에 통증을 느낄 때도 있다. 치료는 극히 곤란하다(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미국 미네소타주 트윈시티의 미네소타주립대 앞에는 작은 커피가게가 있다. 2005년 여름, 이 대학 도서관에 드나들 일이 있어 그 커피가게를 알게 됐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부딪친, 낯익은 얼굴. 살색 얼굴. 나와 비슷한 이목구비. 그러나 너무나 완벽한 영어 발음으로 주문을 받는 터라, 다른 말은 못 붙이고 그저 콩글리시 발음으로 “커피요, 작은 걸로” 하고 말았다. 돌아오는 그의 미소가 묘했다.
다음번 들렀을 때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거치대에 꽂힌 한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기억을 더듬자면, 한인 입양아모임 소식지 같은 거였다. 내 또래거나 좀 어린 듯한 그가 나와 같은 핏줄이었음을 확인하면서 신기했고, 동시에 더 이상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이었다. 그의 핏줄을 물었을 때 혹시 묘한 미소의 그가 이렇게 나오면 어쩌나, 하는 자격지심 탓이었다. “나를 미국 땅에 버려놓고는, 이제 와 영어 좀 배우겠다고 온 주제에 그건 왜 묻는 거지?”
우리는 그들을 버렸다. 그들이 누구의 자궁을 거쳐 대한민국 땅에 태어났는지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팔려간’ 내력도 관심 밖이었다. 그들이 어린 시절에 겪었을 상상할 수 없는 아픔과 거기에 무너져 삶을 망가뜨린 수많은 그들도 잊고 지냈다. 그저, 그들이 훌륭히 자라났을 경우에 한해 우리 맘대로 ‘메이드 인 코리아’ 딱지를 눌러붙였을 뿐이다.
그리고 네 명이 죽었다. 3월24일 미국 아이오와주 아이오와시티에서 양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이선(10), 세스(7), 마이라(5), 엘리너(3). 참혹함을 떠나, 그들의 나이를 보며 새삼 암담했다. 모두가 10년 안쪽, 그러니까 21세기 선진 한국을 합창하던 무렵 입양된 아이들이다. 1970년대 여고생 누이가 미국 펜팔 친구한테서 받은 사진 속 미네소타 풍경은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30년 뒤 직접 가본 트윈시티는 성장의 시대를 지나온 서울보다 낫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은 여전히 한 해 2천 명의 어린이를 미네소타로, 아이오와로, 또 다른 이국의 도시로 입양 보내고 있다.
그 고아 수출국에서 전 국토를 관통하는 멋들어진 21세기 초호화 대운하를 뚫겠다는 이명박 대통령. 고아 수출국에서 몇십억대 재산과 세금 체납 전력을 자랑하며 새 시대의 동량이 되겠다고 나선 후보들. 고아 수출국에서 세계 일류 도약을 부르짖어대는 언론인들. 고아 수출국에서 국제적 감각으로 ‘아륀지’ 발음을 가르치겠다는 총장 어른까지. 참으로 자랑스런 이름들이다. “정부가 미혼모와 가족들에게 사회적 지원을 함으로써 그들이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국외 입양인들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기울일 이는 총선 후보 1119명 가운데 몇 명이나 있을까.
잘려나간 팔다리는 이국 땅에서 붉게 신음하는데, 정작 사지를 잘라 내버릴 적엔 담담하다가 뒤늦게 아련한 환지통만 느끼고 있는 건 아닌지 부끄러워진다. 오늘, 커피 맛 참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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