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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넌센스] ‘직거래’, 그 좋은 걸 몰랐네

등록 2008-03-28 00:00 수정 2020-05-03 04:25

▣ 최성진 기자csj@hani.co.kr

<font color="#00847C" size="3">원론적 이야기는 말 그대로 원론적 이야기라는 뜻이다.</font> 하지만 때와 장소에 따라, 그리고 화자가 누구냐에 따라 원론적 이야기는 다양한 정치적 변주를 낳는다. 이명박 대통령이 그랬다. “오일쇼크 이후 최대 위기가 오는 것 같다. 정치적 안정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MB의 발언이 나오자 야당들은 전기쇼크라도 먹은 것처럼 발끈했다. 대통령은 총선 개입을 중단하라는 주장이었다. 일이 점점 커지자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 진화에 나섰다. 원론적인 이야기는 원론적으로 해석해달라는 원론적 브리핑이었다. “대통령의 언급은 정치학원론 첫머리에 나올 만한 원론적인 이야기였다. 정치 개입이라는 주장은 정치 공세다.” 쯧쯧. 대변인이 MB를 모른다. 창조적 실용주의를 주창하는 MB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대단히 싫어하신다. 한 부처의 업무보고 자리에서 반듯한 보고서를 제출받곤 “책에 있는 모범답안처럼 원론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라”며 호통친 사람은 바로 MB였다.

<font color="#00847C" size="3">물론, 원론적 이야기도 MB가 하면 창조적 발상으로 둔갑하기도 한다.</font> 정부 부처를 돌아가며 ‘버럭 명박’ 이미지를 톡톡히 보여주고 있는 MB께서 3월18일 농림수산식품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또다시 한 ‘버럭’ 하셨다. 생산지에서 900원 하는 배추 한 포기가 소비자들이 구입할 때는 3천원, 5천원 하는 현실을 꼬집으며 농민과 소비자 간 직거래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호통을 치신 것. 직·거·래! 아, 그런 좋은 시스템이 있다는 걸 그동안 우리는 몰랐던 것이구나. 그래서 우리는 그동안 그 비싼 배추를 먹어야 했던 거구나. 그런데 옆에서 그걸 열심히 받아적고 있는 공무원은, 대체 어느 별에서 온 사람들이란 말이냐.

<font color="#00847C" size="3"> MB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는</font> 후배이기도 한 이동관 대변인보다 확실히 한 수 위였다. 자신과 가족의 부동산 투기 의혹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 답변 과정에서 최 후보자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라는 원론적이고 식상한 변명 대신 창조적 답변의 진수를 보여줬다. 그가 국회에 데리고 온 것은 바로바로 귀신이었다.
수입이 없는 아들이 사고판 서울 용산의 금싸라기 땅에 대해 최시중 후보자는 명의를 도용당했다고 받아쳤다. 청문위원이 “그렇다면 귀신이 사고팔았단 말이냐”며 회심의 원투를 날리자 곧바로 “그렇다고 생각한다”는 카운터펀치를 날리는 막강 센스도 과시했다. MB가 청와대에 입성한 뒤 시중에 ‘강부자’ 귀신이 떠돈다는 소문이 사실로 드러난 셈. 권언유착, 여론조사 유출,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등 무수한 의혹에 대한 검증 공세를 꿋꿋하게 견뎌낸 최 후보자는 ‘프레스 프렌들리’를 내세우는 MB의 최종 변기, 아니 최종 병기였던 것이다. 그나저나 앞으로 공직자 재산 공개 때 직계 존비속뿐만 아니라 동거하는 귀신의 재산까지 함께 신고하도록 하는 법이 마련되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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