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태인 경제평론가
지형의 영향일까, 아니면 늙은 노부부가 잠깐 한눈 판 사이 콤바인 차례가 밀려서일까. 같은 예산인데도 어느 들은 비었고, 어느 들은 가을 햇살을 황금빛으로 튕겨낸다. 아니, 이런! 원추형으로 세운 낟가리가 비닐을 뒤집어쓴 빈 들판 가운데 몇몇 이랑은 초록이, 나도 보아달라는 듯 수줍게 까치발을 서고 있다.
“충남에서도 보리를 하나요?” 어렸을 적 맨 옥수수에 쌀이 몇 알 섞인 밥을 내내 먹었노라, 그 밥이 식으면 깔깔하기 이를 데 없어서 목이 아플 정도였노라, 40여 년 전을 회고한 P형에게 묻는다. “아니, 벼야.” “예?”
수시로 논밭 갈아엎는 농부들

지난가을, 때 아닌 태풍 탓이다. 손이 딸려서, 아니면 애써봐야 품도 안 나오는 현실 때문에 그냥 내버려둔, 맥없이 쓰러진 벼 이삭이 그예 싹을 틔운 것이다. 아뿔싸, 하루 종일 그랬듯 자연의 놀라운 생명력, 그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를 이 광경 앞에서도 반복할 수는 없다. 어찌 자연 탓을 하랴. 지구의 기생충이 만들어낸 기후변화로 이삭이 엉뚱하게 물에 잠기고, 또 싹까지 틔웠으니 혹독한 겨울에 얼어죽든지 용케 살아남아도 봄에는 갈려 뭉그러질 운명이다.
인간은 기후만 변화시킨 게 아니다. 이제 농부들은 논밭을 수시로 갈아엎는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흘린 땀 값이 운송비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차라리 분노를 폭발시키는 게 그나마 정신건강을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냥 시장경제라서, 농산물은 수요와 공급의 가격탄력성이 적어서(가격이 오른다 해서 갑자기 많이 길러낼 수도 없고, 또 수요 쪽도 확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런 것이 아니다. 제조업 수출을 늘려야 ‘우리’가 먹고산다고, 선진경제가 되어야 한다고 광개토대왕처럼 미국 시장을 ‘정벌’해야 한다고 괜스레 맺는(또는 상층의 몇몇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악스럽게 추진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앞에서 빗줄기를 헤치며 벼를 묶어 일으켜세울 힘이 어디 남아 있겠는가.
또 있다. 우리 정부가 중뿔나게 앞장서 시장에서 경쟁해야 좋은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며 철도, 수도, 가스, 우편, 의료를 줄줄이 민영화하고 있으니 여기 시골은 공공서비스마저 끊기게 생겼다.
앞으로 우리 농업이 겪게 될 고초를 말할 때 깊게 이랑이 파인 얼굴들은 별 반응이 없다. 어디 이번뿐인가. 우루과이라운드, 한-칠레 FTA, 세계무역기구(WTO) 협상, 아니 연륜이 깊은 이들은 일제시대 공출부터 떠올릴지도 모를 노릇이다.
강둑은 모두 나서서 막는 수밖에
“건강보험이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르신들뿐 아니라 서울의 아이들, 손주들이 아파도 병원에 못 갈 수도 있습니다. 시골은 이제 보조금을 줄 수 없어서 철도, 수도, 우편 요금이 폭등하거나 끊길 수도 있습니다.” 이제야 허리를 내밀어 귀를 기울이신다. “서비스업이 잘돼야 제조업이 잘된다면야 도시로 간 애들은 괜찮은 거 아니냐. 얼마 남지 않은 생, 쭉 그랬던 것처럼 견디고 말지.” 이런 생각들을 하고 계셨던 것일까.
방금 전 김정희 고택에서 본 얼굴 용자처럼 살 수는 없을까. 1천 필의 붓자루가 닳아 없어질 정도의 경지가 되면 날렵한 글씨가 스스로 웃는다는데, 납득할 수 없는 인간사가 모두 용납되려면 어찌 해야 하는 것일까. 논밭을 갈아엎듯 분노를 터뜨려 막고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태풍으로 위태위태한 강둑은 모두 나서서 막는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지장보살이 아닐지라도 세상이 죽음의 고통인데 어찌 해탈할 수 있으랴. 그 무슨 소용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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