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한국의 추한 알몸

등록 2007-09-21 00:00 수정 2020-05-03 04:25

▣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사진을 보자마자 확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가슴 밑바닥에서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 같은 게 치밀었습니다. 사진 속의 당사자는 분명 ‘신정아’인데, 어쩐지 내 누이나 딸, 아니 나 자신이 발가벗겨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러곤 조디 포스터가 주연한 영화 이 떠올랐습니다.
조너선 캐플런 감독의 이 영화는 성폭행을 둘러싼 남성 중심 사회의 왜곡된 통념을 까발립니다. 영화의 무대는 변두리의 작은 바. 술에 취한 선정적인 옷차림의 사라(조디 포스터)가 음악에 맞춰 요란한 춤을 추자 술집 안의 남자들은 성 충동에 휩싸이고, 결국 3명이 차례로 그녀를 강간합니다. 주변 남자들은 환호성을 지릅니다. 하지만 체포된 가해자에게 재판부가 적용한 것은 2급 과실 상해죄(9개월 징역)뿐입니다. 사라가 사실상 강간을 부추겼다거나, 강간은 여성의 유혹에서 비롯된다는 남성적 인식이 작용한 탓입니다.
이어 반전이 시작됩니다. 사라의 고통과 가해자의 낮은 처벌 수위에 문제를 느낀 검사는 강간을 부추긴 남자들을 폭행교사범으로 고발하고,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입니다. 그리고 결국 승리합니다. 강간범들에겐 5년형이, 성폭행 선동자들에겐 구류형이 내려집니다.
1983년 실제로 있었던 사건에 바탕을 둔 영화는, 성폭행의 본질뿐 아니라 남녀 관계의 불평등성에 대한 사회적 시각의 교정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의미를 좀더 확장한다면, ‘보호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만 보호한다’는 왜곡된 인권의식에 충격을 준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2007년 9월의 서울로 돌아와봅니다. 신정아씨 사건이 한국 사회의 추한 구석구석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출세에 눈멀어 마비된 개인 윤리, 학벌 지상주의, 부패한 권력의 비리 등 온갖 병리 현상이 줄줄이 꿰어 나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알몸까지 세상에 드러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닐 겁니다. 설령 사진이 권력형 비리와 연관돼 있더라도 일반인에게 공개되어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의식 수준은 아직 영화 의 무대에 머물러 있는 듯합니다. ‘어떤 극악무도한 죄인에게도 보호받아야 할 인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손가락질의 대상이 여성일 경우엔 사정이 다릅니다. 그들은 남성보다 함부로 다뤄졌고 인격적이거나 성적인 모욕을 당해야 했습니다.
신정아씨와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부적절한 관계’는 드러났습니다. 화려한 신정아를 만들어낸 제2, 제3의 ‘변양균’이 있다면 추적해 밝혀낼 일입니다. 그렇지만 알 권리로 포장한 선정주의나 인권침해에 대해선 세심한 경계가 필요합니다. 신정아를 만만한 희생양 삼아 즐기려는 가학 심리나 집단 관음증이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닌지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모처럼 얼굴을 맞대는 한가위입니다. 살가운 덕담만 해도 부족할 판에 마음 무거운 얘기를 드렸습니다. 편안한 명절 맞으십시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광고

4월3일부터 한겨레 로그인만 지원됩니다 기존에 작성하신 소셜 댓글 삭제 및 계정 관련 궁금한 점이 있다면, 라이브리로 연락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