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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넌센스] 쟁취했다, 회장님 세상

등록 2007-09-14 00:00 수정 2020-05-03 04:25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회장님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는커녕 당황한 기색이 보였단다. 역시나 그것은 기업에 봉사하는 사법부 본연의 임무를 잊은 가혹한 판결이었다. 현대차 경영으로 불철주야 한국에 봉사해온 그분에게 또다시 무슨 봉사를 감히 명령한단 말인가. 더구나 1조원쯤이면 몰라도 준법경영 강연에 일간지 기고라니, 이것은 회장님 적성을 무시한 판결이다. 판사가 재판정에서 “피고인이 말이 좀 어눌한 것은 알지만”이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그는 사정을 알고 있었다. 회장님이 얼마나 강연을 싫어하는지. 그것을 알면서도, 그 어렵다는 강연을 무려 한 번 이상 하라니. 기업에 봉사하는 사법부 맞는가? 더구나 사회봉사 판결에 회장님 부하 직원들이 절망에 빠졌다는 루머가 번졌다. 민주노동당 김형탁 대변인의 성명대로 “강연 원고와 기고문 작성이라는 사회봉사가 부하 직원들의 몫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회봉사냐, 사내봉사냐 그것만이 문제로다.

그것은 동(洞)들의 창씨개명 혹은 위장전입이 아니다. 구로구청은 가리봉의 역사를 그렇게 가리고 싶은가 보다. 지하철 구로공단역을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바꾸었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퍼졌다. 심지어 구로구 이름도 도마 위에 올랐다. 지난번 지방선거 때에는 아예 구로구 이름을 바꾸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사라진 백년정당 열린우리당 후보도 있었단다. 구로구 지킴이를 자처하는 임아무개씨는 열린우리당 후보가 ‘다행히’ 낙선하자 안심했다. 하지만 믿었던 한나라당 구청장의 기습에 믿음을 잃었다. 마침내 구로구가 가리봉동 이름을 바꾸는 작업에 돌입한 것이다. 공단의 역사가, 쪽방의 흔적이 그리도 ‘안 좋은 추억’인가 보다. 한국은 그렇게 개발의 독재자는 기억하지만 개발의 현장은 지우고 싶어한다. 뜻밖에 지우고 싶은 기억은 강남에도 있었다. 강남구 포이동은 이름을 바꾸지 않고 아예 이름을 없앤다. 옆의 개포동과 통합하면서 포이동은 사라진다. 호적을 파듯이? 판자촌의 추억이 그리도 지우고 싶었나 보다. 포이동 동민은 내년 1월1일 개포동 동민이 된다. 물론 그것은 위장전입이 아니다. 그래도 사라진 동들을 찾습니다.

물론 남들의 추억보다 동민의 현재가 중요하다. 다만 사라질지 모르는 가리봉동을 위해 잠시만 돌아보자. 박노해의 시 ‘가리봉시장’이 있다. 노래로도 만들어진 은 가리봉의 운명을 예감하듯 “모든 게 잊혀져간 꿈이 되어 그 빛을 잃어가”로 시작한다. 그리고 “가리봉시장에 밤이 익으면/ 허기지고 지친 우리 공돌이 공순이들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구경만 하다가/ 허탈하게 귀갓길로/ 발길을 돌린다… 닿을 길 없는가요 슬픈 마음뿐인 걸/ 잊어야 하는가요 슬픈 마음뿐으로// 그를 아는 사람들이 소리내어 찾지 않네”로 끝난다. 정말로 가리봉동은 소리내어 찾지 않는 동네가 되었을까? 돌아보니 10여 년 전이다. 박노해를 따라서 “가라, 자본가 세상! 쟁취하자 노동해방!”이라고 외치던 시절이. 마침내 회장님 세상이 도래했다. 불과 10여 년 만에, 넌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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