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란주
법무부는 지난 4월25일, 기술 숙련도가 높은 이주노동자에게 영주권을 부여하겠다고 발표했다. 기술자가 부족한 탓에 생산현장에서 미등록(불법) 체류자를 놓지 못하고 있으니, 외국인 기술자를 합법적으로 장기 고용할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해보겠다는 것이었다. 이주노동자 중에 ‘합법 체류’한 기간이 5년 이상이며, 기술과 한국어 능력을 갖추고, 일정 수입이 있어 스스로 생계 유지가 가능한 이들을 선별해 영주권을 줄 계획이라며, 올해 법제도를 갖춰 내년부터 시행하겠다고 했다. 이는 3년 이하 단기 미숙련 노동자만 받아들이겠다던 기존 입장을 일정 뒤집은 것으로 일단 긍정적인 내용이다.
합법 체류 5년의 기술자?
그러나 옥에 티가 몇 가지 있다. 그중 가장 황당한 ‘티’를 꼽자면, 수많은 미등록 체류 기술자를 외면하고 오로지 ‘합법 체류자’로만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단속에 쫓기면서도 생산현장을 묵묵히 지켜온 많은 미등록 노동자들의 ‘합법화’ 염원을 여지없이 깔아뭉갠 것이다. 굳이 ‘미등록’에 대한 책임을 따진다면, 그간 이주노동자들이 노동 기간을 연장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으므로 부득이 ‘미등록’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으니, 합리적인 방안을 내놓지 못한 한국 사회와 정부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미등록 노동자를 배제한다면 도대체 누구에게 영주권을 주겠다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지난 시기, 연수제도 등 외국인력 도입 제도 모두가 노동 기간을 3년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으므로, 지금 당장은 5년간 ‘합법 체류’하며 기술을 익힌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법무부로 대표되는 정부는 여러 차례 합법화를 들먹였다. 여수 화재 참사가 일어났던 올해 초만 하더라도, 부작용이 많은 ‘단속과 강제 추방’ 대신 고용허가제 계약국가 출신 미등록 노동자들이 자진 출국 뒤 고용허가제를 통해 재입국할 수 있도록 정책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여수 참사로 인해 들끓던 여론이 가라앉자마자 그 약속도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법무부는 또 느닷없이 8월부터 12월까지를 ‘불법 체류 외국인 강력 단속기간’으로 설정했다. 경찰, 노동부 등 관계기관을 총동원하겠다고 하니 그 위세에 간담이 다 서늘할 지경이다. 그러고 보니 2003년 11월이 떠오른다. 고용허가제가 시작되던 그때, 합법화에서 배제되었던 장기 체류 미등록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리고 단속에 쫓겨 줄줄이 죽어가던, 그때 말이다. 이처럼 정책이 갈피를 못 잡고 오락가락하는 사이, 이주노동자의 삶은 엉클어지고, 더불어 영세업체들의 생사는 갈림길을 달리고 있다.
짐보따리에 비상금을 숨기다
자그만 금형 공장에서 공장장으로 일하고 있는 미등록 노동자 소헌은 늘 짐을 싸놓고 산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탓이다. 한국 생활 9년째, 미등록 체류 6년째, 연수생으로 와서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구박받던 일이 엊그젠데 어느새 공장장이 되었다. 물론 지금 일하는 회사는 무척 규모가 작다. 노동자도 몇 안 되니 모두 가족같이 일한다. 요즘 가족 같은 회사 식구들은 모두 한숨으로 나날을 보낸다. 얼마 전 사장은 거래처를 방문했다가 불법고용 금지 계도활동을 나온 법무부 직원을 만났다고 한다. 불법 체류자를 고용하면 예전보다 처벌이 강화되니 어서 내보내라고 하더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사장은 길게 탄식했다. 만약 소헌이 회사를 그만두면 사장은 직접 쇠를 깎아야 할 형편이다. 그 뒤로 소헌은 짐보따리에 비상금 100만원을 숨겨두었다. 만약에 잡히면 회사에 폐를 끼치지 않고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준비해둔 것이다. 소헌은 그 돈을 한장 한장 세면서 기도했다고 한다. ‘삶’에 대한 자신의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한국에서 보낸 9년 세월이 헛되지 않도록, 또다시 미래를 알 수 없는 아득함에 빠지지 않도록, 내가 서 있는 이 땅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자신의 힘으로 어려운 회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소헌은 오늘도 사장님 등을 떠밀어 내보냈다. “사장님은 회사 들어오지 말고 거래처 다니면서 오더(주문)나 따오세요. 물건은 얼마든지 만들어드릴 테니 걱정 마시고….”
노동자는 이 사회의 크나큰 자산이다. ‘불법’이거나 ‘합법’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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