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2002년 3월 초의 일입니다.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가 주변 인사를 불렀습니다. 민주당 쪽에서 막 터뜨린 서울 가회동의 ‘공짜’ 빌라 거주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게 여기서 막아라.” 이 총재의 주문은 하나였습니다. 주변 인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을 알리는 것이 좋다”며 모든 관련 사실의 공개를 건의했지만, 이 총재는 고집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온 한나라당의 초기 반응이 “터무니없는 흠집내기다”였습니다.
2002년 16대 대선 판도의 첫 변곡점인 ‘빌라 게이트’는 이렇게 진행됐습니다. 그리고 3월20일 이 총재가 기자회견을 통해 “서민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 것은 큰 잘못”이라고 사과한 뒤에야 1차 매듭이 지어졌습니다. 그사이 이 총재가 입은 상처는 치명적이었습니다. 3월 이전까지 40% 이상의 지지율로 부동의 1위를 달렸던 이 총재는 지지율이 급락했고, 급기야 3월 중순 이후 실시된 여러 여론조사에선 노무현 민주당 예비후보와의 가상 대결에서 패하는 처지가 됐습니다.
아마도 이 총재는 자신의 저 멀리서 파문이 가라앉길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애써 외면하고픈 심정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대선 후보에게 ‘검증’이란 칼날이 겨눠지는 순간 상황은 통제할 수 없는 양상으로 돌변합니다. 국민의 호기심은 들끓고, 결국 ‘끝장’을 보는 쪽으로 치달립니다. 너그럽고 우호적인 마음들이 한순간에 차갑게 돌아섭니다. 흔한 말로 호미로 막을 수도 있었던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형국이 되고 맙니다.
올 대선 지지율 1위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사업가 김경준씨의 BBK 횡령 및 옵셔널벤처스 주가조작 사건 관련설에서부터 부동산 차명 보유설, 투기 의혹설 등 봇물 터지듯 검증 물결이 밀려옵니다. 이 전 시장으로선 억울하기도 하고, 화도 날 겁니다. 게다가 사실무근의 사안도 있을 겁니다. 그래선지 이 전 시장의 반응은 직설적입니다. “날 끌어내리기 위해 세상이 미쳐 날뛰고 있다. 총체적인 이명박 죽이기다.” 2002년 ‘빌라 게이트’ 당시 이회창 총재 쪽 태도보다 훨씬 격렬합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국민은 ‘끝’을 봐야 납득할 듯합니다. 이 전 시장의 성숙하지 못한 반발만으론 상황이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제기된 의혹 사안의 ‘처음과 끝’에 대한 명확한 설명만이 정도(正道)입니다. 김경준씨 사건만 하더라도 이 전 시장과 김씨의 친분 관계, 그리고 연관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적지 않습니다.
검증의 칼날은 선두 자리의 후보에게 가장 가혹한 법입니다. 1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궁금증, 그것이 검증의 속성입니다. 이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떤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지 2002년 ‘빌라 게이트’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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