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계삼 밀양 밀성고 교사
며칠 전, ‘야자’ 감독을 하기 위해 저녁 먹을 곳을 찾아 학교 근처를 어슬렁거릴 때였다.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 하나가 내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바로 옆 식당으로 쪼르르 들어가는 것이었다. 녀석은 식당문을 열면서 “엄마~” 하고 크게 소리를 쳤는데, 그게 참 정겨웠다. 그런데 어머니는 가게 안쪽 방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나오고 있었다.
그 집에서 한 끼 때울까 싶었던 나는 폐가 될 것 같아 서둘러 떠나려다 그 가게를 다시 보았다. 손님이 드나든 흔적이 없었다. 저녁 먹으러 온 제 아들이 오늘의 첫 손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글로벌은 재수없고, 스탠더드는 무섭고…
자전거를 타고 어슬렁거리며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은 내 오랜 취미이자 습관이다. 그 길 위에서 더러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만나기도 한다. 녀석들이 헐레벌떡 달려와 알은체를 할 때 나는 몹시 행복하다. 작은 골목길 어디를 가도 내 소년 시절의 추억들은 완연하다. 내가 태어나 19년을 자랐던 곳, 대학, 군대, 교직 초년 시절을 뺀 나머지 내 삶의 테두리는 결국 이 작은 도시에 한정지워질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이 작은 도시가 갑갑했으나, 이제는 이 삶의 구체성이 좋다.
그러나 나는 흐뭇함의 뒷자락에 매달린 ‘소멸의 그림자’를 느껴야 한다. 인구 10만의 작은 도시, 우리에게도 ‘생활의 시대’는 있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이 작은 농업 도시는 끝없이 밀려났고, 내 어버이들의 삶은 풍화되어왔다. 내 자전거가 상설시장으로 가는 오르막길로 접어들 때, 나는 내 고교 시절을 떠올린다. 어느 주말, 나는 친구들과 작당을 하고 상설시장 어느 구석진 주점으로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파전 한 접시를 앞에 두고 처음으로 막걸리를 배웠고, 알싸하게 번져가던 ‘최초의 취기’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 묵은 냄새가 흐붓한 이 상가는 오가는 사람이 드물다. 쭈글쭈글한 노파가 조그만 텔레비전을 지치도록 바라보고 앉은 주점, ‘점포세’ 전단지가 펄럭이는 옷집, 누가 이런 데서 물건을 사갈까 싶도록 허술한 잡화상, 사는 사람보다 파는 사람이 훨씬 많은 이 시장은 그렇게 늙고 지쳐 있다.
나는 요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 읽는다. 대통령과 관료들의 의도를 아무리 이해하려고 애써봐도 내 머리로는 ‘글로벌 스탠더드’ 말고는 달리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게 ‘글로벌’이라는 말은 좀 재수가 없고, ‘스탠더드’는 차갑고 무섭다.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global: 세계적인, standard: 표준, 이 단어가 무슨 뜻인지도 알고, 그래서 글로벌하게, 스탠더드하게 살 만한 사람들, 그렇게 살고 싶어 안달난 사람들, 그런 이들만 거기에 맞춰 살았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어느 영화인에게 되물었다지. “그렇게도 자신이 없냐?”고. 이쯤하면 그이 말처럼 ‘막 나가자는’ 건데, 그렇게도 자신이… 없냐고…요?
솔직한 내 심정이 이렇다. 미안합니다, 대통령님. 정말, 자신이 없습니다. 이 백성들 많은 수가 지금 대략 이래요. ‘세계 최대의 시장 미국’으로 두 주먹 불끈 쥐고 나아가려니, 주먹은 어떻게 쥐어보겠는데 영어가 안 돼서 우선 걱정입니다(영어마을에 들어갈 돈이 없거든요). 우당탕탕 밀려올 저 메이저리그 선수들하고 맞붙으려니, 이건 더 난감합니다. 제가 단골로 다니는 이발소 아저씨는 이제 아메리칸 정통 헤어 프랜차이즈 무슨무슨 뷰티숍하고 붙어야 할 텐데, 어떡합니까, 그 아저씨는 아직도 바리캉이 익숙지 않아 가위로 일일이 머리를 치시는걸요. 근데, 민간의료보험료가 너무 비싸 결국 펜치로 제 이빨을 뽑기도 한다는 그 미국식 ‘글로벌 스탠더드’도 이 땅에 적용되는 건 아니겠죠? 한미 FTA에서 화끈하게 들어주고, 대신 대북제재를 좀 풀어서 대북경협 쪽으로 뚫어보려 한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 혹시 그렇게 되면 우리 젊은이들은 북한 청년들하고 일자리 경쟁해야 되는 건 아니겠죠?
미안합니다, 자신 없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힘없는 사람들은 ‘경쟁력이 없으니 희생해줘야겠다’는 논리를 강요당해왔다. 한미 FTA는 그 최종 완결판이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도대체 경쟁이란 게 뭔가. 힘없고 약한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다만 우리는 가난하지만 정감 있는 나날을 살고프다. 제발 ‘지금 이 모습대로’ 살아갈 권리를 다오. 이 작은 도시에 잔뜩 드리운 ‘소멸의 그림자’를 생각하면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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