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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낙원의 꿈 | 권보드래

등록 2006-02-24 00:00 수정 2020-05-03 04:24

▣ 권보드래/ 서울대 강사·국문학과


용산역 새 역사에 간다. 서울의 마지막 구시가지라고 해도 좋을 용산에서 서울역까지의 거리, 그곳도 요즘 바뀌고 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군 주둔지였다가 해방 뒤에는 미 8군 기지가 돼버린 80만 평 드넓은 땅이 본모습을 찾기 시작해서인가? 용산가족공원이며 국립중앙박물관이 들어서면서 후락했던 용산역도 첨단 패션으로 거듭났다. 요 한 10년 기세등등한 철골 삐죽한 유리 건물에, 백화점이며 멀티플렉스를 앉히고. 두어 달 전 집 근처에 전철이 생겼고, 그 전철 종착역이 용산역이기에, 새 역사를 구경할 일이 종종 생긴다.

왜, 끝이 보이지 않는 거냐

먼저 6층에 올라가 표를 끊고 7층에 올라가 영화를 본다. 상영관은 한창 성가 높은 제일제당 발 CGV. CGV를 잡아야 흥행에 성공한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란다. 영화를 보고 나선 3·4·5층에 포진해 있는 각종 음식점을 기웃거린다. 2층 전철역에서 영화관까지 올라오면서 눈요기를 해두었던 곳이지만, 한·중·일·양식은 물론이고 베트남에 타이 음식까지 있어 선택하긴 쉽지 않다. 대신, 음식점을 기웃거리다 보면 바로 옆 옷집들을 기웃거리게 되고, 그러다 보면 저쪽에 있는 전자상가까지 궁금해지는 편리한 구조다. 그야말로 원스톱 엔터테인먼트. 다행히 용산역사는 겁날 만큼 크진 않고, 건물 중앙에선 야외로 나갈 수도 있다. 그래도 이 건물에서 영화를 보고 밥까지 먹고, 그러고 나서야 답답해지기 시작하니, 몇 년 사이 진화가 스스로 놀랍다.

5~6년 전 일인가? 고속터미널 역에 냉큼 내렸다가 한참 우왕좌왕한 일이 있다. 예전 생각만 하다 센트럴시티의 품에 답삭 안겼던 건데, 문제는 도무지 그 품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온 방향을 헤매고 다녀도 도대체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거다. 출구인가 하고 나가보면 번번이 또 다른 실내고, 한쪽 방향으로만 걸어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으려니 하고 줄기차게 걸어도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20~30분쯤 헤매고 나니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아니, 왜, 도대체, 밖으로 나가질 못하게 만들어놓은 거야! 히스테리라도 한번 부리고 싶은 걸 겨우 누르고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다시는 그런 건물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맹세했건만.

하긴, 진종일 코엑스에서 놀곤 한다는 청춘도 요즘엔 종종 만났다. 나하고 별다를 바 없는 청춘인데 그렇다. 언젠가 과외 수업 중 “어렸을 때 기억 가운데 선명한 건?” 하고 물었다가 “으음…. 현대백화점에서 풍선 선물 받아 놀던 거요” 하는 대답을 듣고 경악한 적이 있었는데, 도시·아파트·백화점 같은 환경이 그만큼이나 오래된 거다. 아파트 인구 거주자가 전 인구의 50%를 돌파한 것도 벌써 4~5년 전 일이다. 서울 토박이에 아스팔트 킨트로 자라났는데도 내 머릿속 추억으론 집 앞을 오가던 우마차며 막대 들고 헤매던 뒷산이 저장되어 있건만, 인공의 환경은 20~30년 사이 급속한 속도로 성장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뚜껑 덮인 거대한 도시가 머잖아 현실화될 거라는 생각도 든다. 기술 발전 정도야 확신할 수 없지만, 사람들이 인공을 열망하는 이상 속도는 점점 빨라지지 않겠는가.

인공에 대한 우리의 동경

섣부른 자연 예찬을 조롱한 오스카 와일드를 읽고 있는 참이라, 섣불리 인공을 우려할 자신은 생기지 않는다. 왜 타워팰리스식 주거가 매력적인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참이라 참견하기가 저어되기도 한다. 주거와 더불어 음식도 쇼핑도 레저도 한 건물 안에서 해결되는 그런 환경에 대한 동경, 고도의 인공에 대한 동경은, 자신감의 소산이거나 반대로 불안감의 소산일 텐데. 내가 세계를 지배한다, 그런 자신감이거나, 맨얼굴로는 세계를 대면하지 않으리, 그런 불안감. 세상 대부분 일이 그러하듯 아마 사태는 복합적일 것이다. 강남을 욕하면서 강남을 동경하는, 인공의 뉴욕이나 파리에서 살기를 바라는 시선이 들끓는 한 우리는 자칫 이 복합건물 속에서 길을 잃고 말리라. 인공낙원의 꿈은 언제나 이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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