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보드래/ 서울대 강사·국문학과
<프라하의 연인>을 보다가 이건 또 무슨 징후일까, 생각한다. 올 초인가 <봄날>을 볼 때만 해도 억지스런 신기 취미려니 했다. 상처받은 영혼이니 운명적인 만남이니 화인(火印) 같은 사랑이니 하다가 생뚱맞게 웬 ‘다른 남자’람. 모처럼 등장한 고현정의 이미지를 십분 활용하려면 ‘변치 않는 사랑’ 쪽이 더 나았을걸. 의식불명에 이어 정서장애를 겪는 첫사랑을 두고 첫사랑의 동생에게로 마음을 옮기다니. 진부한 건 싫다는 건가. 안 어울려 안 어울려.
몇 달 뒤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또 첫사랑을 버리는 남녀를 볼 때까지만 해도 그냥 희희낙락했다. ‘너무 오래 굶은’ 노처녀에, 낄낄대며 러브호텔을 찾는 이혼녀에, 즐거워할 거리가 너무 많았으므로, 첫사랑의 애절한 사연을 저버리는 남자 주인공도 이 독특한 드라마에 어울리는 독특한 설정이려니 했다. 그런데 <프라하의 연인>까지 보다 보니, 그래, 이건 분명 어떤 징후 같다. 요즘, 드라마 속 남녀들은 열심히 배신 중이다.
배신이라면 새로운 이야깃거리는 아니다. 돈에 홀려 배신하고, 오해 때문에 변심하고, 주변의 반대를 견디다 못해 등을 돌리고. 변치 않는 게 뭐 얼마나 있던가? 그러나 요즘 드라마의 배신은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색다르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첫사랑은 자기 병을 알리지 않기 위해 애인 곁을 떠나는 여자다. 멀리 이국 땅에서 위를 절제하고, 항암치료를 이겨내고, 생존확률을 확인한 뒤에야 여자는 돌아온다. <프라하의 연인>은 어떻더라? 애인의 아버지를 파멸에서 건지기 위해 애인을 떠난 남자, 이 악물고 그리움과 싸우며 지낸다. 애인에게 달려가고 싶을 때마다 톱질하고 대패질하는 노동으로 자기를 달래면서. 이들의 배신은 당연히 가짜 배신이다.
진짜 배신은 몇 년 뒤, 이 사람들이 진실을 고백하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애인을 찾을 때 이루어진다. 나, 단 한 번도 너를 잊지 않았어. 널 떠난 건 모두 널 위해서였지. 죽을 정도로 외롭고 힘들었지만 널 떠올리며 견딜 수 있었어. 응당 감동과 화해와 사랑의 확인이 뒤따라야 할 대목이다. 애인들도 애달파하고 눈물을 쏟고 이들을 어루만진다. 그러나 그뿐이다. 사랑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내 마음 속에서 이제 너, 그쳤거든.” 애인들은 그렇게 말할 뿐이다. 몇 년 세월이 흘렀고, 그들 또한 살아남아야 했던 것이다.
옆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는가는 되레 작은 문제다. <겨울연가>식 상실, 첫사랑을 잃은 뒤, 그 치명적인 상실 뒤의 삶은 모두 공허요 일종의 가짜였다는 스토리에서라면 배신은 일어나지 않는다. 본래의 자신, 진정한 관계를 찾아가는 회귀의 드라마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스토리는 달라졌다. 이별은 치명적이지만 그 뒤의 삶이 가짜는 아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은, 몇 년 전 그 사람이 그랬듯 지금 내겐 지켜야 할 운명이다. 이해해야만 할 사연이 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내 삶을 바꿀 순 없다. 뒤늦게 확인한 네 사랑 때문에 마음이 아프겠지만, 죄 짓는 처지가 돼도 난 돌아설 것이다. 너 없이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으므로, 너 역시 이제 그래야 할 것이므로.
젊은이여 386을 배신하라
그래, 배신해라, 배신해라, 배신해. 돌아서는 주인공의 등을 보면서 TV 앞에서 괜스레 주먹을 휘둘러본다. 제발 날 버려다오. 월드컵 때 뛰어나왔던 그 청춘들, 촛불시위 때 인터넷을 달궜던 그 열기들, 그러곤 뜻밖에 노무현을 찍어버린 그 포스트 386들. <조선일보>뿐 아니라 나도, 1980년대식과는 완전히 다른 그 에너지가 이른바 386을 지지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당시엔 즐거웠다. 바로 뒷세대에 의해 인정받는 세대가 어디 흔한가. 야, 386들은 성공한 거야! 그러나,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87년 6월에, 고도성장의 시절에, 정치적 성공까지. IMF 때도 386들은 몇 년차 안 되는 싱싱한 직장인이어서 취업난도 명예퇴직도 비켜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실패하지 않고 인생을 알 수 있던가. 내 손으로 실패를 획책하지 못하는 나는, 그래서, 요즘 드라마의 젊은 주인공들을 선동 중이다. 배신해라, 배신해라, 배신해. 그래서 네 삶을 살아다오. 경쟁에 찌들고 취업난에 지친 얼굴 대신 젊은 얼굴을 보여다오. 내 면전에서 그 매력적인 얼굴을 돌려버려다오. 그래야 내게도 위기가 올지니. 위기 속에서 혹 생생해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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