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경태/ 한겨레21 편집장 k21@hani.co.kr
그녀… 는 왜 안 되는 걸까.
저는 이 순간 엉뚱한 방향으로 샜습니다. 그녀...는 왜 안될까.이런 이야기를 쓰려고 했던 게 아닙니다. 이혼한 뒤 지지고 볶는 ‘그녀’에 관해 언급하려다가 다른 생각이 난 겁니다. 과연 우리는 ‘그녀’라는 표현을 억압해야 하는 것일까.
나름대로 ‘열혈 우리말 청년’이던 적이 있습니다. 90년대 초반, 고 이오덕 선생의 <우리글 바로쓰기>를 탐독할 때의 일입니다. 저는 그 책을 열심히 읽고 여러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대로 실천하려 노력했습니다. ‘~에 있어서’ 따위의 일본어 번역투 문장은 삼가야지, 한자어투성이인 문장은 쉽게 풀어써야지 등등. ‘그녀’도 그중의 하나였습니다. 원래 우리말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바른말이었습니다. 그 원칙들은 제 글쓰기 생활에 하나의 ‘강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획일적인 ‘그’가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주는 여성적인 느낌이 좋은데, 꼭 나쁜 언어습관으로서 훈계당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늘 ‘그’로 써야 하는 삭막함도 정이 떨어졌습니다. ‘그녀’를 사용해보고 싶었지만, 때때로 교열 과정에서 수정됐습니다. 이러다 보니 <한겨레21>에 ‘여인열전’을 쓰는 여성학자 김재희씨는 원고를 보낼 때 “꼭 ‘그녀’를 살려주세요”라는 특별 주문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발간된 <말이 올라야 나라가 오른다 2>(한겨레신문사 펴냄)도 ‘그녀’를 규탄합니다. 국어순화운동인 이수열씨는 “어떤 경우에도 ‘그녀’는 절대로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일본어에서 ‘그’는 ‘彼’(かれ)이고 ‘그녀’는 ‘彼女’(かのじょ)입니다. 이수열씨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彼女’의 짜임새를 보면 여성을 남성에 종속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일본 사회의 성차별 의식이 뚜렷하므로 그것을 흉내낸 ‘그녀’를 쓰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겨레의 수치임을 알아야 한다.”
‘겨레의 수치’라는 표현을 접하며 저는 발끈했습니다. 언어는 움직이고 진화하는 것인데, 일본어의 유래만 가지고 ‘그녀’를 사생아 취급하는 게 옳을까요. 영어의 ‘she’에서 나왔든 일본어의 ‘彼女’에서 나왔든, 그걸 반드시 제국주의의 괴물처럼 비난해야 할까요. ‘겨레의 말’엔 과연 성차별 요소가 없을까요. 전통의 언어 습관에 대한 집착이 배타적 민족주의의 무기가 되는 건 아닌지 의심해봅니다. 이에 반해 여성학자들은 ‘차이 드러내기’라는 차원에서 ‘그녀’를 지지합니다. 언어에서 성을 차별하는 게 진짜 성차별적 언어들에 저항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번호 표지이야기엔 고통받는 ‘그녀’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들의 가슴앓이도 적지 않습니다. 언어생활에서 ‘그녀’가 존중받아야 하듯, 이혼 뒤에도 ‘그’와 ‘그녀’가 깔끔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게 표지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안 그러면 아이도 불행해집니다. 이를 위해서 <한겨레21>은 ‘이혼의 매너’라는 화두를 꺼내들었습니다.
왼쪽 사진처럼 이혼을 축제의 장으로 만드는 것은 비현실적인 상상입니다. 그럼에도 ‘이별의 기술’을 생각합니다. ‘그’와 ‘그녀’들이 헤어지되, 나쁘게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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