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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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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와 말장난

등록 2005-04-20 00:00 수정 2020-05-03 04:24

▣ 고경태/ 한겨레21 편집장 k21@hani.co.kr

그는 재미없는 사람입니다. 말버릇처럼 “놀러오면 재미있게 해주겠다”며 싱거운 농담을 하지만, 막상 그의 거처인 타이 북부 치앙마이를 방문하면 금방 거짓말임을 알게 됩니다. 제가 관찰한 바로는, 그에겐 별 취미가 없습니다. 유일한 낙이라면 카페에서 커피를 홀짝거리며 시간을 죽이는 일이지요. 그는 그것을 ‘소요’한다고 표현합니다. 소요…. 여유를 가지고 노닥거리며 살자는 겁니다. 그는 그렇게 ‘소요’하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훌쩍 떠납니다. 이채로운 것은 ‘소요’가 들끓는 분쟁지역만 쫓아다닌다는 겁니다. 벌써 그렇게 생활한 지가 18년이 흘렀답니다. 이번엔 그가 캄보디아 파일린을 찾았습니다.

국제분쟁 전문기자 정문태씨를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한겨레21> 독자들이라면 그의 활약을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동안 그는 40여개국 분쟁지역을 돌아다니며 그 나라의 최고위급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을 취재해왔습니다. 그 수많은 인물파일 속에는 캄보디아 정치인들도 포함돼 있습니다. 1996년 10월, 이미 그는 훈 센 총리와 그에게 투항하던 이엥 사리 크메르루주 전 부총리를 단독 인터뷰함으로써 외신기자들 사이에 화제를 뿌렸습니다. 이번엔 크메르루주의 살아있는 최고책임자인 누온 체아와 크메르루주 대통령을 지낸 키우 삼판입니다. 다른 나라의 이름 있는 그 어떤 언론에서도 두 사람을 이번처럼 한꺼번에 인터뷰한 경우는 없습니다. 그동안의 인맥을 총동원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그는 직접 파일린으로 달려가 사생결단으로 매달렸다고 합니다.

오는 4월30일은 ‘베트남전 종전 30돌’ 기념일입니다. 30대 이상이라면 ‘월남 패망일’이라는 말이 더 친숙할 겁니다. 한마디로 미국이 월맹군에 두 손을 들고 도망간 날이지요. 하지만 ‘크메르루주 혁명 30돌’은 왠지 생경합니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현 호치민)이 함락되기 13일 전, 크메르루주 혁명군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을 장악했습니다. 미국을 등에 업고 1970년에 쿠데타를 일으켰던 론 놀 정권을 뒤엎은 겁니다. 1975년 4월, 인도차이나반도의 두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도미노처럼 성공한 셈입니다.

여기엔 엄청난 논쟁의 싹이 숨어 있습니다. 4년 뒤 베트남군은 형제국인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킬링필드’라는 경악스런 사실이 알려지고… 베트남이 10년간 캄보디아를 지배하고… 세계의 진보 진영은 친베트남공산당과 친캄보디아공산당계로 갈려 설전을 벌이게 됩니다. 결국 한편에선 미국도 나쁜 놈이지만 크메르루주도 정말 나쁜 놈이라는 데 반해, 또 다른 한편에선 베트남이 캄보디아에 몹쓸 짓을 했다고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배운 ‘킬링필드’엔 엄청난 음모가 숨어 있다는 겁니다. 정문태씨는 “그 음모를 밝히지 않고선 21세기 휴머니즘은 말장난”이라고 단언합니다. 그 ‘킬링필드’엔 21세기에도 계속되는 미국의 위선이 몰래 엎드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도 기대됩니다. <한겨레21>은 베트남 항불·항미전쟁의 전설적인 영웅 보 응웬 잡 장군(베트남전 당시 총사령관)을 만났습니다. 그의 나이 94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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