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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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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넌센스] 이은주의 자살과 ‘태일이 아빠’

등록 2005-03-02 00:00 수정 2020-05-02 04:24

▣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고쳤냐?”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당신은 속으로 찔끔할까? 코나 눈, 턱을 고쳤냐는 이야기가 아니다. ‘성적 정체성’에 관해서다. ‘성전환 수술’했냐는 게 아니다. ‘성적’의 ‘정체’를 돈 주고 은폐했냐는 거다. 이 지점에서, 몇년 전에 들었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한 토막이 떠오른다. 한 종합병원의 진료실에서 함께 근무하던 또래 남녀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하얀 옷을 입은 두 사람은 서로 직종이 달랐다. 문제는 말다툼에서 밀린 그 남자가 단말마적으로 내뱉은 엉뚱한 소리였다. “야, 너 학력고사 몇점 받았어?”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는 성희롱적 발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유치’한 자들 때문에 성적 조작을 ‘유치’하는 고등학교와 대학이 생겨나는 건 아닐까?
아무튼 ‘성적을 고친’ 인간들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자식’을 잘못 사랑한 그들은 아버지임에도 ‘자식’으로 강등됐다. 지 자식만 생각하는 나쁜 자식! 동료 교수와 짜고 자신의 아들을 입학시킨 서강대 전 입학처장과 교장한테 돈 주고 자식의 답안지를 조작한 서울 ㅁ고의 학부모들이다. 이를 접한 내 친구는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아버지’들의 이기주의에 치가 떨린다”는 거였다. 사실은 ‘아버지’가 아닌 ‘아버님’에 관해서였다. 딸을 위한답시고 사위 후보의 성적에 시비를 걸려는 장인어른의 치밀한 ‘장인 정신’에 열받은 거다. 무슨 성적? 나이·직업·재산, 심지어는 출신지역에까지 시시콜콜 점수를 매긴 종합성적! 이럴 땐 성적 조작해도 된다. 장모와 처제를 돈으로라도 구워삶아라!
좌로 찔러, 우로 찔러, 길게 찔러…. 군사정권 시절 고교에서도 가르쳤던 총검술 동작이다. 몰지각한 학부모는 교사와 교수에게 찌른다. 기업인들은 국회의원들을 향해 찌른다. ‘그냥 찔러’가 아닌 ‘몰래 찔러’다. 얼마 전 검찰에 소환된 강신성일·김희선·김충환 의원은 그 피해자다. 주머니를 향해 ‘몰래 찔러주는’ 검은돈의 유혹. 어떻게 하면 그런 뇌물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 어릴 때부터 교육이 필요하다. 최근 어느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 학교문집에 쓴 글을 보면서 해답을 찾았다. 이런 내용이었다. “오늘 외국인을 만났다. 그래서 내가 ‘Hello’라고 했다. 사탕을 주기에 ‘You’re welcome’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외국인이 그냥 갔다. 집에 와서 부모님께 얘기했더니 그럴 때는 ‘땡큐’라고 한다고 하셨다.” 꼬마는 제대로 대답했는데, 엄마가 교육을 잘못 한 건 아닐까. 이유 없이 주는 사탕엔 ‘천만에요’가 정답이다. 세살 사탕, 여든살 현금 된다. 물론 철없는 의원들께선 ‘천만에요’ 대신 이렇게 답할지도 모르겠다. “천만~원이에요? 에계!”
이은주를 모독한 것인가, 전태일을 모독한 것인가.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이은주의 자살을 애도하며 전태일을 떠올렸다고 썼다. 일부 네티즌들은 여기에 발끈했다. 전태일 열사를 일개 연예인의 죽음에 비교한다는 게 가당찮다는 비판이다. 글쎄…? 여기서 한 가지 고백할 것은, 요즘 나의 여덟살 난 아들은 수시로 전태일의 일촌 가족을 모독한다는 점이다. “태일이 아빠 같은 사람이 병원에 불을 붙여 죄 없는 어른들이 많이 죽었대.” 알코올중독 환자가 화염병을 던져 4명이 불에 타죽은 병원 방화 사건을 TV에서 보고 나서다. 어린이 잡지에 실린 ‘전태일 만화평전’의 영향 탓이었다. 평소에도 내가 술을 조금만 마시면 “태일이 아빠”라고 놀린다. 전태일 열사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근데… 만화작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해야 하나, 우리 집 꼬마를 고소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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