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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기록’이다 | 이재명

등록 2004-12-10 00:00 수정 2020-05-03 04:23

▣ 이재명/참여연대 투명사회팀장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한국방송의 대하드라마가 눈길을 끈다. 뻔해 보이는 줄거리임에도 새삼 관심을 두는 이유는 극중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어떠할지 궁금해서다. 기억하기로 어린 시절 위인전의 충무공은 완전무결해 보이는 영웅이었다. 반면 원균은 충무공을 모함하고 자리를 탐내는 인물이었으며 기껏해야 덕장인 이순신에 비교되는 맹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드라마 속의 둘은 다소 다르게 그려지는 듯하다. 비단 이번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이들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약간씩의 차이를 보여왔다. 과거의 위인전이 역사적 인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그 틀에 맞춰 해석했다는 일말의 의심이 없진 않지만, 나름대로 역사적 기록에 근거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상황을 가장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일기로, 단순히 생사를 걸고 싸우던 당시의 전쟁터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순신의 꾸밈없는 인간상을 보여주는 소중한 사료이다. 그 진실이야 어떻든 이순신에 대한 우호적 평가가 가능한 것은 바로 그에 관한 기록들 때문이다.

국회 소위원회 절반만 회의록 남겨

기록의 대상이 개인을 넘어 집단 그리고 국가가 되는 순간 그 기록은 공공의 영역에 존재하게 된다. 대의제 국가에서 국정의 책임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기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기록과 기록 보존이 민주주의의 전제가 되는 이유다. 결코 그 어떤 권력도 기록의 울타리를 넘어서서는 안 되며, 기록을 통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국민의 의지를 배반한 위정자들이 ‘후대의 역사가 나를 평가하게 하리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로 국가의 주요 정책이 결정되고 집행되는 핵심 자료인 대통령의 재가문서, 이른바 ‘통치- 이 용어는 대단히 권위적인 것이다. 하지만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청와대의 대통령 관련 기록물을 관리·보존하던 비서관의 명칭은 통치사료비서관이었다- 사료’는 박정희 대통령 2만6408건, 전두환 대통령 1만2701건, 노태우 대통령 5601건, 김영삼 대통령 8433건에 불과하다. 집권 기간에 매년 1천~2천건의 기록만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 중 대통령의 일상적 활동을 담은 사진과 같은 홍보자료 등을 빼고 사료적 가치가 있는 기록만을 간추린다면 그 수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이 8년의 재임 기간에 남긴 통치 사료만 7700만쪽인 데 반해 우리의 경우는 이승만부터 김영삼 대통령까지 남긴 통치사료의 전체 분량이 50만쪽에 불과하다. 이 차이는 국가의 규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성숙 정도를 말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기록하지 않는 관행은 민주주의의 틀을 어느 정도 갖추었다는 오늘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최근 17대 국회의 소위원회 회의록 작성 현황을 분석해봤더니 겨우 절반 정도만이 속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국회 소위원회는 법안과 예산을 실질적으로 심의하는 회의다. 의원 개개인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에 따라 입법 혹은 예산 편성의 중요한 쟁점이 판가름 나게 된다. 따라서 모든 회의의 발언 하나하나까지 기록될 때에만 의원에 대한 정치적 책임도 물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비단 기록이 작성되지 않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과거의 기록은 이미 무수히 폐기됐거나 폐기되고 있다. 그리고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실적으로 이 문제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과거사 규명에서 가장 큰 장애요인이 될 것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경험한 것처럼 진상규명의 대상이 되는 사건의 대부분은 집권자 혹은 국가권력이 주체가 되어 법과 제도의 경계 밖에서 저질러진 행위였다는 점에서 관련 기록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할뿐더러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도 비밀의 울타리 안에 꽁꽁 묶여 있는 실정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제대로 된 기록도, 보존도, 공개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흔히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고 한다. 결코 기억은 기록만큼의 신뢰에 다다르지 못함을 의미한다. 기억이 조작과 각색의 과정을 거치는 데 반해 기록은 왜곡과 수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아직 기억이 기록을 지배한다. 이제라도 되돌려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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